예사로운 하루_04

디스크 낳는 취미 생활

by 이랑

나에게는 병이 하나 있다. 주기적으로 집 안의 가전, 가구를 재배치해줘야 하는 병.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가정주부이다 보니 아무리 쓸고 닦고 예쁘게 배치해도 점점 익숙해지다 보면 집이 너무 좁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마다 간단하게는 가구의 방향을 돌리고 일이 커지면 방에서 방으로 가구의 위치를 옮겨본다. 가구만 옮기는 건 아니고 가전제품도 덜 지저분하면서 손에 잘 붙는 방향으로 이동시킨다. 인터넷에 검색해 예쁜 인테리어를 찾아 따라 해보기도 한다. 물론 수없이 고민해서 옮긴다고 항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 집과 맞지 않거나 생각만큼 깔끔하지 않아 힘들게 이동시킨 것들을 더 힘들게 제자리도 돌려놓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렇지만 매일 똑같이 반복하던 집안일이 아닌 다른 행동을 하려는 시도 자체만으로도 정체된 공기 속에 갇혀있는 것 같아 답답했던 마음이 환기되는 느낌이다.



아이들 책도 주기적으로 위치를 바꿔주는데, 자리만 바꿔도 몇 개월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책을 새 책인 것 마냥 열심히 읽기도 하고 가끔 자리를 결정 못한 책들을 대충 쌓아 놓으면 버리는 줄 알고 난리가 나기도 한다. 이러니 힘들고 귀찮아도 손대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단순히 심심하다는 이유로 자꾸 옮기는 건 아니다. 우리 가족 맞춤형으로 배치를 해도 살다 보면 아이들이 성장하고 부모의 생활 패턴에도 변화가 생기기도 하면서 누구에게도 유용하지 않은 인테리어가 발생한다. 혹은 생활하다가 조금만 바꾸면 동선도 최소화하고 생활하기 훨씬 편할 것 같은 부분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여름에는 더워서 침대를 베란다에 맞닿아 있는 벽에 붙이고, 반대로 겨울에는 한기가 드니 침대 머리를 돌려 두 사람 모두 침대 헤드 혹은 다리를 벽 쪽으로 두고 자는 식이다. 방학 때는 아이들이 심심할 때마다 TV를 너무 많이 보려고 해서 TV와 마주 보고 있던 소파를 90도 방향으로 돌려버렸는데 영어로만 보라고 했더니 아예 리모컨에 손댈 생각조차 하지 않길래 다시 원상복귀 시키는 일도 있었다. 낮에 혼자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서 TV 보는 게 제일 꿀맛이지만 아이들은 이 맛에 최대한 늦게 빠졌으면 좋겠다.



낮 동안에 여기를 바꿔볼까 하는 아이디어가 번뜩 떠오르면 아이들을 재우고 남편도 잠든 고요한 밤에 혼자 줄자를 들고 돌아다니며 원하는 위치의 수치부터 잰다. 가구를 버리고 새로 사는 것 외에는 도저히 답이 없어 포기할 때도 있지만 기존에 있던 가구만의 재배치만으로 가능하다면 침대에 누워 머릿속에서 수차례 시뮬레이션을 돌리는데, 성격이 급해 작은 소품은 밤에 미리 옮겨보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 집에 혼자 있는 오전에서 이른 오후 시간에 실행에 옮긴다. 수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상상을 현실로 옮긴 후에 귀가하는 가족들을 짠 하고 놀래켜주는 재미가 있기도 하지만, 배치했다가 생각보다 별로인 경우 원위치시켜야 되는 경우에는 힘 쓰는 일을 맡아하는 남편에게 상당히 미안하고 민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혼자 하는 게 마음은 여유롭고 편한데 대신 허리가 혹사당한다. 대부분의 가전, 가구들의 무게가 상당한 데다 특히 책장을 옮겨야 할 때는 책을 빼고 가구를 이동시킨 후에 다시 다시 꽂아야 하기 때문에 두 배로 힘들다. 큰 가구를 옮길 때는 끌리면서 발생하는 소음이 발생할까 봐 바닥에 걸레도 여러 장 깔아보고 매트 위에 눕혀 끌어도 봤는데 혼자서 무작정 힘으러 옮기려니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다. 지금은 나름의 요령으로 대부분의 가전, 가구의 바닥에 살짝만 밀어도 쉽게 미끄러지는 슬라이드를 크기별로 붙여놓았다.



얼마 전에는 큰 아이가 방에 책상을 놓고 싶다고 해 거실에서 공용 책상으로 쓰던 커다란 식탁을 다시 부엌으로 옮기고 어릴 때 쓰던 좌식 책상에 다리를 최대치로 연결해 방으로 옮겼다. 모서리가 둥근 파란색 유아용 책상과 여기저기 자리를 못 잡고 옮겨 다니던 장식장 겸 책장의 말도 안 되는 조합인데다 아직 둘째와 같이 자고 있어 작은 방이 싱글 침대 2개와 책상과 책장으로 꽉 차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그 위는 3일도 못가서 포켓몬 카드와 과자 쓰레기, 읽은 건지 읽다 만건지 읽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책들로 뒤덮여 지우개 하나 찾으려면 한참을 뒤져야 하는 난장판이 되었다. 제발 정리 좀 하라는 잔소리를 듣게 되었지만 첫째는 혼자 오롯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데 매우 만족하고 있고 나도 오랜만에 뿌듯했다.




이런 식으로 식탁이나 소파를 살짝 밀어 방향을 바꾸는 정도의 자잘한 변화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바로바로 시도해보고, 책장이나 수납장 같은 가구를 아예 다른 방, 또는 거실로 옮기는 대이동도 일 년에 서너 번은 이루어진다. 이런 패턴이 수년간 반복되다보니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다 혼자 옮겼냐고 놀라워하던 남편도, 새 집인 것 같다며 신나하던 아이들도 시큰둥해진 것 같다. 나조차도 다른 신경 쓸 일이 많아 꽤 오래 집에 손을 대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틀 전 주방을 지나가는데 문득 커피 머신 아래쪽 바닥에 동그란 커피 자국이 눈에 띄었다. 이미 말라붙은 걸 보니 어제 커피를 내리다가 생긴 자국 같은데 이제야 발견했다. 지금 쓰고 있는 커피머신이 물받이 용량이 워낙 작은 모델이라 커피 한잔만 내려도 물이 넘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찰랑이는데, 세척하려고 분리할 때마다 아무리 조심해도 매번 넘치고야 만다. 어제도 물받이를 옮기다가 살짝 쏟은 모양인데 왜 몰랐을까. 알았는데 귀찮아서 잊었을까.



아무튼 선반 아래까지 살짝 스며든 것 같아 닦으려다 문득 어차피 밀어서 청소해야 하는 김에 조금만 더 밀어볼까 싶어졌다. 안 그래도 커피 머신이 구석에 있어 매번 식탁 의자를 밀면서 이동해야 하고, 싱크대 위의 정수기와 식탁 옆에 있는 커피머신 사이의 거리도 꽤 멀어(그래봐야 열 걸음 정도지만) 커피 한 잔 내리면서 몇 번이나 후다다닥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내가 상상했던 차분하고 우아한 커피 라이프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정수기를 이동시키는 건 불가능하니 방법은 머신의 위치를 옮기는 것뿐이다. 그리고 거기게 맞춰 식탁도 돌려야겠다는 간단하고 깔끔한 계획을 세운 뒤 커피 머신이 올려진 선반을 통째로 밀어 옮겼다. 자리를 바꿨더니 콘센트와도 멀어져 멀티탭도 새로 가져와 전선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식탁을 밀기 위해 두 손으로 식탁을 잡고 힘을 주는 순간 꼬리뼈에서 엄청난 찌릿함이 느껴져 억 하며 식탁 위로 쓰러졌다. 그리고 극심한 통증과 삼일 째 허리를 완전히 펴지 못하고 약을 먹고 바르며 요양 중이다.



왜 무거운 걸 자꾸 혼자 옮기냐고 걱정하던 남편이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잔소리할까 봐 그냥 청소하려고 살짝 밀려다가 이렇게 됐다고 둘러댔지만, 허리 통증을 핑계로 식탁과 커피 머신은 새로운 자리를 유지하는 중이고 일단은 꽤 만족스럽다.


집안일에서 손을 놓고 수발받으며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고 있으니 편하긴 한데, 사실 1년에 한 번 정도는 꼭 이렇게 허리를 쥐고 쓰러지는 일이 발생한다. 이제 나이를 생각해서라도 가구 옮기는 취미는 포기하고 소소하게 소품 정도만 관리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완전히 손을 떼기 전 아이들의 방 분리와 동시에 남편의 옷방이자 게임방 이동이라는 가장 큰 파이널 과제가 남아있다. 아무리 손이 근질거려도 어지간해서는 손댈 수 없는 책장, 책상, 장롱, 스타일러와 같은 대이동이라 한 번에 성공해야 하니 당분간은 쉬면서 머릿속으로만 철저히 준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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