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사로운 하루_03

저혈압과 저기압과 상관관계

by 이랑

아침에 눈을 뜨니 대기 중에는 뽀얀 안개가 가득 차있고, 베란다 난간에는 빗방울이 올망졸망 매달려 있다가 똑똑 떨어지고 다시 맺히기를 반복한다. 새벽부터 비가 온 모양이다.



지난주에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알았다. 오늘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올 거라는 것을.


어떤 단어를 사용해도 묘사하기 힘든 공기가 온 몸을 짓누르는 느낌. 관자놀이가 먹먹해지는 느낌, 누군가 내 머리를 하늘로 쭉 잡아당겨 그 안에 뭉게뭉게 먹구름을 채워 넣은 느낌. 신경이 곤두서 TV에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생기 넘치는 말소리, 기분 좋은 웃음소리마저 거슬리는 느낌.


혈액 순환이 잘 되어 늘 활력이 넘치는 인간들은 평생 이런 기분 모르겠지. 머리로는 부러워하며 TV 소리를 자장가 삼아 소파에 말라붙은 껌처럼 오전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몇일에서 몇 주씩 이어지는 여름 장맛비, 겨울 내내 흐린 날씨의 영향은 거의 받지 않는다. 또 어떤 비는 정신을 개운하게 하고 어떤 비는 세포까지 적셔 흐물거리게 만든다. 모든 비가 같은 영향을 끼친다면 일 년의 삼분의 일은 이불속에 누워있어야 했을 것이다. 심리적인 이유로 비가 오는 걸 보니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져 드러눕는 건 아니라는 나의 핑계 아닌 핑계다.



그리고 오늘은 눈으로 한 번, 어플로 두 번 확인한 후에야 종일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슨 차이일까.


모두가 날씨 앱으로 기온, 강수 확률, 풍속을 확인할 때 내가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게 있다. 바로 기압이다. 평소에 쭈그리고 앉아있다가 일어날 때 핑 도는 경험을 자주 하거나 지하철에서 한 번이라도 쓰러져 본 사람은 안다. 기온과 강수량보다 몸을 더 힘들게 만드는 건 저기압이라는 것을.




기압이 1013.13 hPa(헥토파스칼) 보다 낮으면 저기압이라고 한다. 지난주 비 오던 날의 기압은 1005hPa, 저기압이다. 어쩐지 몸이 너무 무겁더라. 그리고 오늘의 기압은 1011hPa. 기준치보다 조금 낮긴 하지만 이 정도면 일상생활은 가능한 수치이다.


날씨가 저기압이다, 기분이 저기압이다라고 하면 공기가 위에서 짓누르는 듯 몸과 마음이 축 처지거나 폭발 직전의 상태로 치닫고 있는 부정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과학적인 정의에 의하면, 저기압은 말 그대로 공기가 상승하려 하기 때문에 공기의 압력, 즉 아래로 누르는 에너지가 약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고기압일 때 더 많은 공기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가 어쨌든 고기압이 화창한 날씨의 상징이라면, 저기압은 수증기와 함께 열대성 저기압, 태풍, 허리케인을 만드는 요인이라고 하니 저기압이 무서운 놈인 건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인 것 같다.


저기압일 때 컨디션이 안 좋아지는 이유는 뭘까. 한 기사에 따르면 기온과 기압이 낮아지면 자율 신경계 중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는데, 이로 인해 체온이 상승하고 심장 박동이 느려진단다. 가뜩이나 혈압이 낮은데 더 낮아지는 것이다. 어쩐지 어쩐지. 이러니 몸이 축축 처지고 기력이 없을 수밖에. 머리가 묵직했던 건 뇌에서 피가 부족하다는 아우성이었던 모양이다. 이럴 때마다 엄마가 기력이 없을수록 밥을 더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했는데, 가뜩이나 부족한 피가 그나마도 소화시키느라 위장으로 쏠려 뇌는 더 혈액 부족에 시 달린 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살짝 든다.



신체의 특정 부위가 아프면 진통제를 먹고 열이 나면 해열제를 먹으면 될텐데 저기압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에는 약도 없다. 이럴 때 고함량 영양제, 커피, 초콜릿 같은 거 때려 넣어봤자 고카페인 부작용으로 속 쓰리고 어지럽기만 하다. 할 일이 태산인데 아이들 하원 전까지 거실에 내동댕이 쳐진 내복도 못 건질 것 같아 억지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포기하고 잔다. 가정 주부의 유일한 특권이랄까.


그러나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고 누워만 있을 수 없는 날이면 효과가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다. 보통은 자기 직전에 말끔하게 씻는 걸 선호하지만 애들을 보내자마자 따뜻한 물로 평소보다 조금 오래 샤워를 한다. 우울증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비 오는 날의 내 증상도 비슷한 것 같아 시작했는데 이 습관이 혈액 순환을 조금이나마 도왔던 것 같다. 반신욕을 하면 더 좋겠지만 이 상황에 욕조 청소하고 물 받고 빼고 할 기력까지는 없다.



생각해 보면 가장 몸을 힘들게 하는 건 맑은 날이 이어지던 중 급격히 찾아오는 흐림이다.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균형을 맞춰야 자율신경계가 잘 유지된다고 하는데, 몸이 며칠새 안정적인 고기압의 편안함에 젖어 방심하고 있던 나의 부교감신경계는 스텝이 꼬여버린 모양이다. 인간은 참 변화에 빨리 적응하지만 동시에 사소한 변화에도 급속도로 무너지기도 하는 나약한 존재이다. 내가 특히 그렇다. 엄살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면서도 나만 의지박약에 핑계 덩어리인 것 같아 서글퍼지기도 한다.



비는 그칠 기미가 안 보이고, 일기예보 상으로도 종일 날이 흐리다니 고민된다. 힘을 내려면 지금 철분제를 먹는 게 맞을까 짠 김치볶음밥을 먹는 게 맞을까. 아니지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해두는 게 맞겠지. 그리고 나는 냉동실에 아이들 몰래 숨겨놓은 초코바가 하나 남았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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