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 근육
어느 날 일찍 최근한 남편이 서점에 들러 책 한권을 사들고 왔다.
요즘 어휘력이 예전같이 않다며, 말을 할 때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필사가 도움이 될것 같다고 했다. 쓴다는게 중요하지 좋은 공책은 필요없다며 몇 년째 서랍장에 꽂혀있던 뜯어쓰는 세로형 노트의 아무 장을 펼쳐 첫 챕터의 첫 번째 글을 따라 적었다. 그리고 노트와 책과 볼펜은 함께 같은 자리에서 한 계절을 지나보냈다. 좋은 생각인 것 같다며 칭찬하고 동참했던 나도 별반 다를 게 없이 야심차게 꺼낸 새 노트의 첫 째 장만 쓴 채로 옆자리에 올려두었다. 그러다 문득 자전거를 타며 잉여 체력이라는게 생겼는지 이 소비를 너무 아깝게 느껴진 나는 다시 필사를 시작했고 이제 딱 일주일 되었다.
SNS에서 많이 본 예쁜 글씨체로 정갈하게 좋은 글귀를 따라쓰는 영상과 사진들을 상상하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야심찬 포부와 달리 팔과 손가락에는 필기와 관련된 근육이 남아있지 않았다. 첫날부터 고군분투 그 자체였다. 잉크가 종이에 묻어나오기는 하는데 글자가 내 맘대로 써지지 않는 이상한 느낌. 볼펜을 꽉 쥐려고 하면 할수록 손에 힘이 빠지고 땀이 나면서 오히려 미끄러진다. 최대한 날려쓰지 않고 획순대로 따라가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글자가 한 여름 태양 아래의 아이스크림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무슨 성격이 이렇게 급한지 한 번에 한 획씩, 꺾이지 않게 쓰는게 이렇게 힘들 일인가. 반듯하게 쓰려는 마음과 한 획에 흘려쓰는데 익숙해진 팔 근육이 끊임없이 힘겨루기를 하는데 도무지 중재가 안된다.
어휘력이고 나발이고 글자반듯하게 쓰는데 온 신경이 집중하자니 글자를 처음 배우는 유치원생이 된 기분이었다. 수 년간 모든 문서를 온라인, 모바일로 전송하거나 인쇄해서 제출하다보니 펜을 직접 쥐고 썼던 거라고는 미끄덩한 판 위의 지렁이 같은, 사실상 글자라고 할 수도 없는 신용카드의 싸인 정도 인지라 손에게 펜을 쥐고 종이위에 꾹꾹 눌러쓰는 그 감각을 어떻게 잊을 수 있냐고 다시 끌어내라고 다그치기도 민망하다. 지금도 이 글을 타자로 치고 있지 않은가. 그저 실직상태의 근육들이 최대한 빨리 제자리를 되찾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하루에 하나씩, 짧은 글을 두 개도 쓰며 책의 절반쯤 도달하니 손이 점차힘을 얻어가고 있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집중력을 잃고 딴 생각에 빠지면 겨우 반듯하게 세워둔 글자의 허리들이 힘을 잃고 획이 점점 짧아지고 구부러지다가 빈대떡처럼 다 들러붙어버리는 일은 여전하다. 그닥 길지도 않은 한 페이지를 다 쓰고 한껏 굽어버린 어깨와 허리를 일으켜 잠깐 쉬는데 옆 책상에 7살 작은 아이의 노트가 보인다. 손에 힘이 생겨야 글씨도 잘쓰고 그림도 잘 그릴 수 있게 된다며 글씨 쓰기 연습을 하라고 매일 잔소리를 해댔는데, 지금 보니 나보다 힘있어 보인다. 쟤는 나름 필체가 있네.
그리고 다시 내 노트를 내려다보니 이게 한 사람이 쓴 글씨가 맞나 싶다. 노력했다가 나아지다가 포기하다가 노력하다 결국 힘이 빠지고 마는 모든 과정이 매 페이지마다 담겨있다. 그래도 미세하게나마 점점 어깨에 힘도 덜 들어가고 손이 연필을 잡는 그 착붙는 느낌을 되살리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로 위안을 얻으며 일주일치 꾸부랭이들을 지나 다음장으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