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사로운 하루_05

글쓰기의 힘

by 이랑


살다 보니

읽기에 빠져드는 시기가 있고

뭐라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안달 나는 시기가 있다.


읽어서 몸과 마음을 가득 채우고자 하는 시기가 있고

글로 적어 최대한 몸 밖으로 배출해버리고 싶은 시기가 있다.



한동안 밤마다 일기장에 휘갈기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남들에게 보여주는 공간에까지 뭐라도 쓰지 않으면 답답해 미칠 것 같은 마음이더니 지난 몇 주간은 장르도 주제도 일관성 없이 닥치는 대로 활자에 빠져 살았다.


추정컨대 이 변화는 내 마음의 안정된 정도와 여유 공간에 따르는 것 같다.

다만, 아이들은 여전히 천방지축이고 일상은 특별할 것 없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는 무엇에 기인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가 좋은 마음을 나누고자 하는 선한 동기에서 비롯되는 건 아니다. 온전히 나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를 표현하고 이해받고자 하는 소리없는 몸부림이랄까.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가 처음 생긴 건 올해 초였다.


지난해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언저리, 공기가 건조하고 선선해지면서 축축 쳐지던 마음에도 보송한 바람이 불었는지 불현듯 펜을 잡고 글자를 눌러쓰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필사는 수동적이고 눈과 팔이 너무 바빠 생각할 틈이 없어 글을 쓴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괜히 볼펜으로 낙서를 끼적여 봤지만 쓰레기만 늘릴 뿐 만족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이 쓸모도 없는데 매년 회사에서 꼬박꼬박 받아다가 한구석에 쌓아두는 수첩 중 한 권을 꺼내 정말 오랜만에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다.



좋은 기분은 굳이 활자로 남기지 않고 머리로 음미하며 마음에 새기는 편이라 일기는 불평불만과 분노 표출, 자책의 목적이 강해 다행히도 꾸준히 쓰지 못하지만, 매일 해야 하는 일들을 순서대로 정리하고 체크하는 건 쓰기 정체성 찾기의 욕구를 한 방에 해결해 줄 것 같았다.


내가 직접 구입한 것도 아닌 데다 다이어리의 앞 절반을 비워두고 중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터라 깔끔하고 예쁘게 꾸미는 것은 안중에 없었다. 핸드폰 하던 메모를 최대한 글로 적는데 초점을 맞추고 하루하루 글자로 칸을 채워나가는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 그러다 가끔 굴러다니는 스티커 하나씩만 붙여주어도 그날 하루가 한층 더 뿌듯하고 재미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반년을 보내면서 다이어리에는 사용감이 점점 묻어나기 시작했고, 필기도구도 꽤 늘어나 있었다. 연말부터는 본격적으로 온갖 유튜브 채널과 SNS를 섭렵한 뒤 나에게 딱 맞는 구성의 다이어리를 구입하고 볼펜을 회사별, 색깔별, 두께별로 구입했다. 올해는 새 해 첫날부터 계획적으로 야무지고 깔끔하게 채우고 꾸밀 생각으로 설렜지만 내가 크게 간과한 점이 있었다. 나는 가정 주부라는 것.



알차게 꾸민 다이어리는 여러 가지 목차와 요소들로 이루어지지만 무엇보다 하루의 스케줄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데, 나는 스케줄이라고 할 만한 일조차 없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아이들의 학교와 유치원 행사, 준비물, 방과 후 활동 참가 신청, 주말 체험 신청 같은 게 90퍼센트 이상이었다. 오롯이 나와 관련된 다른 내용을 채우고 싶어 매일 하는 빨래, 설거지, 장보기 같은 집안일들을 억지로 써놓기도 했는데, 이딴 것 밖에 쓸게 없다는 생각에 들여다볼수록 밀려오는 우울감이 더욱 커져 비워두는 날이 늘어갔다. 조금 더 그럴듯한 걸 쓰고 싶었다. 글자가 아니라 글을 쓰고 싶었다.


다행히도 다이어리를 쓰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자체가 꽤 성취감을 주어 지속하긴 했지만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은 여전했고, 억지로 채워진 칸을 보는 마음이 더 허전해지기도 했다. 사람들을 만나 하소연해봤자 답이 없다는 것은 이미 숱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방편으로 오래전 방전되어 버린 노트북을 열어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작 몇 편의 이야기를 쓰고 다듬고 올리기를 반복하는 한 달여의 시간 동안 나조차도 느끼지 못한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그 효과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고싶은 말이 임계치까지 가득 차 찰랑대는 느낌, 키보드에 손만 올리면 갇혀있던 말들이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 점차 사그라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중구난방 올리는 일기가 아니라 꾸준히 연재할 수 있는 일관된 주제와 형식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글쓰기에서 잠깐 손을 뗀 지 벌써 한참이 지났다. 주제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는 것은 핑계고, 어느 순간부터 쏟아내고자 하는 욕구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솔직하겠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글을 올릴 때 어느 정도까지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옳은지 아직 모르겠어서 진짜 생생한 투덜대기는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몇 편의 글을 작성한 것 만으로 감정이 정리되어 버린 걸까? 만약 그렇다면 글이라는 건 무엇이기에 이토록 강력할까.


분명한 것은 말은 토해내고 나면 텅 빈 공간을 남기지만, 글은 내보낸 만큼 다시 채울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는 것이다. 그 힘은 남이 가진 것에 비추어 나를 보지 않고, 내가 가진 것에 비추어 남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지금 공허함 없이 맘껏 책을 읽으며 채워 넣을 수 있는게 아닐까 싶다



... 라고 한 달만에 글을 올리는 나의 게으름을 합리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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