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
아이는 외식을 하러 나갔던 쇼핑몰에서 우연히 서점을 발견하고 신이 났다. 얼마 전 추석에 양가 조부모로부터 받은 두둑한 용돈 덕에 좋아하는 만화책을 잔뜩 살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이미 만원짜리 여러장을 받아 쥔 순간부터 아이의 머릿속에는 사고 싶은 책의 제목들이 스치고 몇 권을 살 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지만 그 동안 말을 꺼내지 못한 것은 엄마의 매서운 눈초리 때문이었다.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아이는 일러스트 몇 장을 제외하고는 글자만 빼곡한 책보다는 만화책을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마땅한 스토리가 없는 넌센스 퀴즈, 웃기는 이야기, 공포 이야기, 형제 자매 간에 서로 놀리기 바쁜, 일종의 유튜브를 2d로 보는 것과 다름없는 책들에 푹 빠져있었다. 이왕이면 진득한 스토리가 있는 일반 책이나, 교육적인 내용이라도 티끌만큼이라도 담겨있는 만화책을 읽었으면 하는 엄마와는 항상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모습이 못마땅했던 엄마는 만화책을 읽고 싶으면 먼저 글 책을 먼저 한 권 읽기로 규칙을 정했다. 하지만 만든 사람도, 지켜야 되는 사람도 매우 일방적인 이 규칙은 당연히 매번 새로운 갈등을 만들어냈다.
아이가 글 책을 읽은 날이면 당당하게 만화책을 차례로 쌓아놓고 소파에 편하게 드러누워 뒹굴거리며 낄낄거렸다. 그렇지 않은 날에는 방에 불도 켜지 않고 숨소리조차 조절해가며 만화책을 읽다가 결국 한 시간 가까이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깨달음에 서늘함을 느끼고 쫓아온 엄마가 잔소리를 쏟아내는 것으로 상황이 마무리 되곤했다. 그럴 때면 아이는 읽은 부분에 정성껏 표시해서 곱게 덮어 놓은 뒤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게 천장이나 벽만 바라보며 누워있는 것으로 불만 가득한 마음을 표현하곤 했다.
하루에도 몇 권씩 읽는 만화책을 전부 구입하기에는 비용이 어마어마하고, 학교 도서관은 사서를 구하지 못해 몇 달 째 문을 닫은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주로 동네 도서관을 이용해야하는데 도서관까지 차를 끌고 가서 열 권이 넘는 책을 대출, 반납하는 것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기에 더 이상 뭐라 대꾸했다가는 당분간 새로운 만화책 표지도 구경도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지나 마침 지갑에 용돈이 넉넉한 상태에서 눈앞에 서점이 나타났으니 아이는 신나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점심시간이니 밥부터 먹고나서 서점에 바로 들리기로 약속했지만 이미 눈은 밥보다는 서점이 있는 방향에 고정되어 있었다. 입으로는 씹는 둥 마는 둥 하며 발을 쉴새없이 동동거려 이러면 서점에 안간다는 협박성 경고를 수차례 받아야했지만 아이는 그마저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최대치의 인내심을 발휘해 가족들이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오기까지 기다렸고 마침내 엄마의 허락이 떨어지자 서점으로 빨려들어갔다.
엄마는 한숨과 웃음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자연스럽게 컴퓨터를 찾아 원하는 책의 위치를 검색하고 인쇄한 종이를 손에 꼭 쥔채 아동 서점 코너를 돌고 또 돌고 있는, 그동안 본적 없는 아이의 자발적이고 분주한 모습이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본인이 받은 용돈으로 사겠다고 하니 막을 명분은 없어 아직 유치원에 다니는 동생과 함께 보기엔 그림체나 내용이 너무 지저분한 것을 제외시키고 권수를 조금 줄이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그렇게 서점에서 걸어나오자마자 책을 감싸고 있는 비닐을 뜯어내고 하루종일 그 책들과 함께 했다. 서로 윈윈이다 생각하면서 나름 행복하게 일주일 정도 흘렀을까. 아침을 먹던 아이가 갑자기 외쳤다.
엄마, 나 글자책 두 권 다 읽었어!
한달 전 쯤 아이가 7천원 가량 하는 작은 소형 게임기를 사달라고 했는데 엄마는 그에 대한 대가로 글자책을 두 권 읽는 조건을 내걸었다. 10월 초 긴 연휴가 시작되고, 양쪽 조부모집을 오가고도 남는 휴일을 지나보내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아이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억하고 있었는지 새로 산 만화책을 다 읽고 새로 살 명분이 필요해서 고심끝에 지난 약속이 번뜩 떠오른건지 알수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나 게임기 대신에 만화책 더 사고 싶어.
만화책을 쌓아두고 읽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보여 그 동안 약속한 만큼의 책을 읽지 않은 것도 잔소리 하지 않고 넘어가 줬는데 또 만화책? 엄마는 참고 참았던 잔소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너가 읽은 건 별개의 약속이고, 지금까지 만화책 읽은 것에 대해서는 한 권도 안 읽어놓고 어떻게 또 사달라고 하느냐. 거실이며 방이며 다 읽은 책들이 널려져 있는데 책을 꽂아놓기도 귀찮아하면서 뭘 더 사려고 하느냐. 맨날 말장난 하는 쓸데없는 내용만 보니까 말도 조리있게 못하고, 엄마가 하는 말도 맥락을 이해를 못해서 단어 물고 늘어지면서 말싸움 하지 않느냐 등등.
자꾸 이러면 만화책 다 중고로 팔아버릴거다 라는 말이 나오기 직전에서야 가까스로 참았고, 읽을 책부터 결정하라는 말로 마무리하고 학교에 보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쇼파에 좀 누워서 쉬다보니 화가 점점 가라앉으면서 문득 아이가 사달라고 했던 책이 뭐였는지 궁금해졌다. 사달라고 들이밀 때마다 제목 확인하고 후루룩 넘겨보기만 했지 내용을 제대로 아는 책은 없었다. 아이가 가끔 그 나이대에 알기 어려운 어휘나 표현을 쓰는 모습을 보면서도 만화책에서도 배우는게 있긴 있네 하면서 코웃음치기만 했다.
혼날까봐 학교에 들고 가버렸는지 집을 아무리 뒤져도 그 책이 보이지 않아 인터넷 서점 어플에들어가 검색해 미리보기를 클릭했다. 너무 짧아서 내용을 다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유해한 부분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딱히 교육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플에 검색한 김에 그렇게 잔소리를 쏟아부어놓고는 중고로 사면 더 싸지 않을까 싶어 검색도 해보고, 그런 김에 또 중고 장터 어플에도 들어가보니 제법 싼 가격에 세트로 구입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드러누워 핸드폰을 쥐기 시작하니 화면은 책에서 옷으로 옷에서 화장품으로 생필품으로 쇼핑몰에서 동영상으로 쉼 없이 옮겨다녔다.
시간은 순식간의 흐르고 배터리는 쑥쑥 줄어들고나니 화면을 쳐다보느라 눈은 말라붙어 뻑뻑하고 침침해졌다. 그제서야 겨우 고개를 돌리고 일어나 팔을 뻗어 굳은 어깨를 스트레칭하고 눈을 깜빡이며 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아침 등교전 한시간도 안돼 만들어놓은 난장판에서 거의 달라진 게 없다. 나는 오전내내 뭘한거지. 열받은 핸드폰에 충전선을 연결하는데 바닥에 널부러진 만화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만화책만 읽는 아이와 핸드폰만 보고 있는 엄마 둘 중 누가 더 문제인가.
엄마는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해 취미는 독서라고 말하고 외출할 때마다 책이나 이북을 챙겨다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여유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먼저 꺼내든 것은 책이 아니라 핸드폰이었다. 집안일을 할 때, 도보로 이동할 때, 심지어 샤워할 때도 소리를 끄고서라도 동영상을 시청하거나, 딱히 필요하지는 않은데도 세일하거나 갖고 싶은 물건들을 구경하는데 수 시간을 소비하는 날도 잦았다.
그에 반해 아이들은 심심하면 만화책을 꺼내 읽고 외출할 때도 만화책은 필수로 챙겨다녔고, 집에서는 밥을 먹다가도 옷을 갈아입다가도, 가방을 챙기다가도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아이들이 소파에서 만화책을 볼 때 엄마는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집에서 진짜 책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쓸데없는 시간 낭비 하지말고 그 시간에 책을 읽으라고 말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토록 자격 없는 사람의 잔소리라니.
반성의 의미로 아이가 아침에 읽다가 소파위에 고이 뒤집어놓고 간 만화책을 집어들어 읽어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화려한 색감과 유치한 전개에 정신이 하나도 없던 것도 잠시 의외로 재밌다. 의외로 유익하진 않지만 유해할 것도 없는 것 같다. 중고로 올라온거 팔리기 전에 빨리 연락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