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기억, 향수, 예술.
프렌치 디스패치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다. 개인적으로 박찬욱, 폴 토마스 앤더슨, 데이빗 핀처, 레오스 카락스, 베넷 밀러,즈비아긴체프와 함께 가장 존경하는 우리 세대의 거장 중 하나이기에 큰 기대를 가지고 보았다. 영화는 나의 기대를 아득히 넘어서는 완성도였다. 전작의 아쉬움을 말끔히 지우는 걸작이였고 웨스 앤더슨의 정수가 담긴 영화다.
웨스 앤더슨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가 강박적으로 구현하는 세계가 떠오를 것이다. 다채로운 색감과 구도, 대칭이 어우러진 미장센은 웨스 앤더슨만의 개성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연출적인 선택들과 형식이 영화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웨스 앤더슨의 세계에서 형식과 내용은 분리하기 힘들다. 그의 영화에서 주제는 곧 형식이고 형식은 주제이다.
웨스 앤더슨과 대비되는 감독은 드니 빌뇌브나 크리스토퍼 놀란이 떠오른다. 웨스 앤더슨이 다루는 이야기의 세계는 은근히 사실적인 편인 반면에 연출은 형식적이고 인공적이다.
드니 빌뇌브의 근작들은 다루는 세계나 소재들은 비현실적이지만 연출은 상당히 사실적인 느낌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을 관통하는 스타일 중 하나 역시 사실감이다.
웨스 앤더슨은 왜 이렇게 인공적이고 비사실적인 연출에 집중하는 것일까.
다름이 아니라 그것이 그의 영화미학의 핵심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최고작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과거가 아닌 기억되는 과거를 다루고 있다. 이번 프렌치 디스패치 역시 사건이 아닌 이야기되는 사건이 중심이다.
있는 그대로의 과거나 사건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과 이야기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기억과 이야기는 자연스럽고 사실적이지 않다. 더없이 인공적고 인간적이며 예술적인 행위이다.
그가 종종 구현하는 평면적 이미지 역시 사실적인 것으로부터 탈피해 기억된다는, 즉 일차적으로 가공되어서 간접체험되거나 관찰하는 느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그런 형식적인 측면과 이야기가 아주 잘 융합된 영화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흑백과 컬러의 사용이다. 흑백은 과거를, 컬러는 기사를 쓰고 마무리하는 현재를 주로 담았다. 그런데 종종 과거의 흑백에서 짧게나마 컬러로 전환되는 장면이 있다. 이는 빛나고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웨스 앤더슨의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어떤 노스탤지어의 근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되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그런 순간이다. 이 영화의 독특한 점은 그 과거를 기억하고 기사로 쓰는 현재를 컬러로 남겼다는 것이다. 그 과거를 회상하고 간직하고자하는 일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에피소드들은 하나의 액자를 가지고 그 안에 여러 이야기들을 병렬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 역시 각 기자들의 기사라는 액자 안에 있다. 여러 겹의 액자 구조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유사한 구성이다. 이야기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리움의 대상과 관객으로부터의 거리를 극대화시킨다.
첫번째 기사는 앙뉘라는 도시에 대한 스케치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대사이다. 아름다운 화면을 제외하고 대사들만 읽어보면 앙뉘는 무시무시하고 악한 도시이다. 하지만 화면과 음악은 더없이 아름답다. 도시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도시를 바라보는 방식이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이다. 그 시선이 예술이지 않을까. 어두운 비밀을 간직한 세상을 그래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웨스 앤더슨은 말한다.
두번째 기사는 감옥의 예술가에 관한 에피소드다.
참혹한 범죄를 저지른 자가 그리는 아름다운 그림, 감별사와 연관된 유머러스한 일화들을 지나 이 이야기는 예술에 대한 따스한 찬사로 이어진다. 벽에다가 그림을 남긴 것에 분노한 카다지오가 다투던 모세와 포옹하는 장면은 뭉클하다.
이때도 감독은 일화가 아닌 일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기자를 컬러로 담았다. 지속적으로 관철되는 미학적인 선택이다.
그리고 화면비는 두 번 확장되는데 그림이 처음 공개되는 장면과 후에 이 에피소드를 갈무리하는 기자의 장면이다. 모두 공통적으로 이야기되어지거나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장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비율의 흑백화면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스꽝스럽고 어설프고 잔인하기도 하지만 그들이.만든 예술은 그보다 넓고 아름답다.
세번째 기사는 68혁명을 다루었다. 앞의 기사와 형식적으로 반대다. 오히려 아카데미비율(1.33:1)의 불안정한 청춘들을 컬러로 생생하게 그렸다. 학생들 에피소드의 1.33대 1비율은 인물들을 중심에 두고 인물에게 집중하게 만든다. 이는 결국 강렬하지만 좁은 시야를 가진 청춘들을 대변하는 프레임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들은 생생하고 아름다운존재들이다. 삼각관계가 전면에 등장하고 화면비가 넓어진 체스판장면은 그렇지 않다. 기자는 그들의 시야를 넓혔지만 그들의 생생함은 사라졌다. 일찍 떠난 청년이고 비록 그들의 열망은 철없고 무력한 것일지라도 아름답다.
마지막 기사는 맛에 관한 일화이고 이 영화서 가장 탁월한 에피소드다. 경찰서장의 아들납치 사건과 네스카피예라는 훌륭한 요리사의 요리를 두고 일어나는 사건들을 소재로 했다.
이 에피소드가 건드리는 것은 이방인의 고독과 향수이다. 닿을 수 없는 것, 두고와서 갈 수 없는 곳이 있는 고독한 이방인들의 서글픈 연대를 그리고있다. 짤막하게 등장하는 컬러장면은 요리가 준비되는 과정과 시얼샤 로넌의 눈이다. 시얼샤 로넌의 눈은 그 둘 사이의 느슨하고 짧은 연대를 드러내고 요리는 앞에서 말한 그림, 선언문과 유사하다. 생동감넘치는 아름다움들은 잠깐 빛난다.
이 각자의 에피소드들은 비슷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도시에 대한 설명, 감옥의 예술가, 낭만적인 혁명과 사랑, 외국인 요리사, 잡지사 사장,등등 모두 지나가버리고 붙잡을 수 없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
이 영화서 독특한 점은 이 세계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다. 말그대로 이 곳은 죽음과 폭력, 어설픔으로 가득찬 세계이다. 이 작품서 진짜 아름다운 것은 말하는 방식이고 태도이다. 분명히 앙뒤는 폭력적이고 어두운 도시이다. 웨스 앤더슨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의 완벽한 미장센을 지우고 그의 이야기들을 들여다보면 슬프고도 현실적인 시선이 기저에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아름답게 보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행위를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자주 화면 안에 다른 프레임을 두는 구도를 취하는데 이는 액자형식인 서사구조를 시각화하는 동시에 이중으로 프레임을 두어 다가갈 수 없는 아련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영화 전반적으로 수평적인 움직임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는 웨스 앤더슨의 주특기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서 여러 방식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수평 트래킹 숏은 비교적 객관적인 느낌을 주는 카메라움직임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시점이라기보다는 무심하게 훑는 듯한 카메라워크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는 누구의 시점일까. 일차적으로는 사건을 서술하고 적어나가는 기자의 시점일 것이다. 더 나아가자면 결국 이 영화를 만드는 웨스 앤더슨의 그것이기도 하다.
결국 과거를 회상하는 일도 하고 거리를 두고 무력하게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기도하다.
웨스 앤더슨은 영화임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가 말해지는 것임을 알려준다.
애니메이션의 사용, 적극적이고 다채로운 카메라워크 등이 그 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과 마찬가지로 변하는 비율 역시 그렇다.
이 영화의 엔딩은 서글프고 따스하며 완벽하다.
따스한 색감서 사장을 기억하고 간직하는 기자들로부터 멀어지는 카메라는 컷 후 창문 너머로 그들을 찍는다. 영화에서 카메라는 주로 컷을 해서 거리를 두기보다는 천천히 멀어졌다. 하지만 이번의 컷은 급작스럽다. 세계는 컷처럼 급작스럽게 우리로부터 멀어지고 우리가 이미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늦기 때문이리라.
창문은 투명하기에 볼 수 있지만 다가갈 수는 없다. 마치 과거처럼. 향수라는 정서의 완벽한 표현이다.
바깥 액자의 주인공이였던 그들이 이제는 프레임에 담긴 존재들이 되었다. 동시에 초반부 편집장의 시체와 죽음에 대한 묘사를 흑백으로 하고 그를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장면을 컬러로 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제 우리가 그들을 컬러로 기억하고 지키고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