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홀랜드 드라이브 간단스포

by blonded

궁극적으로 나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려는 것입니다. - 프랜시스 베이컨



데이비드 린치와 이 영화이 위상과 난해함에 대한 악명은 공고하니 넘어가겠다. 이미 영화사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 작품이고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니 이 글은 개인적인 잡설을 더하는 정도일 것이다.


이 영화는 천연덕스럽게 두 가지 영화의 레퍼런스를 차용하고 있다. 빌리 와일더의 선셋 대로와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이다. 이 두 영화의 변용과 인유는 직접적이기도(식당이름이 선셋대로다)

영화의 핵심(2부 구성은 주디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기점으로 변하는 현기증과 유사하다)을 구성하기도 한다.


이 놀라운 영화는 다층적이고 모호마며 다면적인 면을 발산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데이비드 린치가 찍은 현기증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다. 하지만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이나 페졸트의 ‘피닉스’ 만큼이나 이 영화에는 현기증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현기증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시선이다. 들뢰즈는 히치콕이 고전 영화와 현대 영화의 사이에 있으면서 운동- 이미지를 완성했다고 했다. 하지만 들뢰즈 스스로가 지적하는 것처럼 현기증을 비롯한 히치콕의 세계는 영화의 재현방식에 불균질함과 부조리를 내포하고 있다. 영화는 재현이라는 영상-비디오의 특징을 따라가면서 궁극적으로는 그 특징을 넘어서 영화라는 형식에 새로운 길을 연다. 이를 보여주는 장면은 현기증의 절정이다. 현기증의 클라이맥스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바로 시선의 불일치이다. 어둠의 실루엣으로 표현되는 마들렌- 주디를 카메라는 보여준다. 얼핏보면 이는 스카티의 시점쇼트로 보인다. 하지만 스카티가 일어서있음을 감안했을 때 아이레벨쇼트로 촬영된 마들렌 - 주디의 이미지는 이상하다. 위치가 맞지 않기에 영화는 은밀히 시선의 불일치를 만들어낸다. 영화의 내적원리로 보면 이 장면은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환상 - 기표와 실재- 기의의 차이를 표현하면서 스카티가 본인이 만든 환상에 경도되어 진실을 보지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간다면 이는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시각화한 것이면서 영화라는 매체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현기증이 영화에 관한 영화임은 모두가 주지하는 사실이지만 이 장면서 시선의 주체는 미묘하게 제거되고 시선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현기증은 이 장면으로 영화의 영화성을 각인시키고 있다. 다시 들뢰즈를 우회하자면 재현 불가능한 대상의 재현을 통해 현기증은 고전 영화와 현대영화의 사이에 위치하면서 전통적 재현과 이미지의 위기를 만들고 혁신시키고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주인공을 하나 고르라면 그것은 베티도 리타도 아니라 ‘시선’이다. 현기증이 제기한 시선의 문제를 린치를 오히려 심화해서 다시 던지고 있다. 영화의 초반부- 10분 즈음- 베티의 이모가 집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집을 본다. 이에 역쇼트로 리타가 집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시점쇼트로 보인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베티의 이모는 리타가 집에 몰래 숨는 장면을 보지 못한다. 여기서 이 쇼트의 순서는 명백히 현기증에서 배태된 시선의 주체 모티브를 끌고온다. 베티의 이모가 집을 보는 장면의 시점으로 보인 앵글의 쇼트는 누구의 시선이란 말인가?

여기서도 남는 것은 주체가 사라진 시선이다. 영화에서 베티가 집에 들어가는 장면은 시점쇼트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영화의 1부에서는 베티만이 아니라 여러 인물들의 시점쇼트가 난무하며 동시에 주인을 알 수 없는 시점쇼트가 존재하거나 급기야 쇼트의 주체가 변하는 장면도 존재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구조는 마들렌의 자살로 구별되는 현기증과 유사하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역시 1부와 2부가 결합된 구조다. 그 전환점은 클럽 실렌시오이다. 실렌시오에서 나와 집을 향한 후 리타와 베티는 파란 박스를 열려고 한다. 그 때 베티는 사라지고 리타는 열쇠로 박스를 연다. 그리고 카메라- 리타는 이에 빨려들어가며 다음 베티의 이모가 방을 둘러본다. 그 다음 다이앤의 방에서 카우보이가 말한다. ‘일어날 때야’


1부와 2부 중 무엇이 현재이고 환상인지 구별하는 시도는 딱히 재미없다. 그리고 내 생각에 정확하지 않은데 오프닝을 살펴보아야하기 때문이다. 오프닝은 댄스를 추는 커플들의 모습을 복제해 여러 커플처럼 보이게 만든다. 오프닝은 명확하게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을 끌어오는 동시에 1부와 2부 중 무엇이 진실인지 찾는 것이 힘듦을 암시한다. 오프닝의 춤추는 커플들의 이미지들 사이서 무엇이 진실인지 당신은 짚어낼 수 있는가?


시뮬라크르는 존나 어려운 개념이어서 나도 잘 모른다. 그런데 끌고 오는 이유는 남들이 잘 모르는 개념을 차용하면 나도 있어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잡설은 차치하고 이 영화에서 다루는 시물라크르(재현-복제)의 문제로 돌아가자. 다시 들뢰즈를 인용하자면 들뢰즈는 시뮬라크르에 대해서 존재론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것이 형상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그 대상과 함께 나란히 존재하는 자립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다시금 이를 근거로 말하자면 1부와 2부 사이에 무엇이 원본인지 판명하려는 시도는 부질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생각에 둘 다 복제-재현(당신이 뭐라고 부르든)환상에 가깝다. 또다른 근거는 역시 실렌시오 극장이다. 침묵을 뜻하는 그 극장에서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밴드는 없고 밴드소리는 들리지만 이 모든 것이 녹음이며 환상’이다. 그리고 가수의 노래는 립싱크이다. 실렌시오 극장의 장면은 명확히 허구와 환상으로 가득찬 세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영화에서 무엇이 환상-허구인지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본다. 무엇보다 배경은 할리우드이다. 할리우드. 원본 없는 복제이자 원형 없는 재현 그 자체인 영화의 공장이다.


영화에서 무엇이 환상인지 구별하는 근거로 2부에 오직 다이앤의 시점쇼트만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만 1부에서 제기된 베티의 시점쇼트가 상당히 특이했다는 점을 간과했다. 베티의 시점쇼트는 부유하는 카메라움직임이 제시되고 그 다음에 리버스쇼트로 베티가 제시되며 시점쇼트임을 드러낸다. 여기서 느껴지는 것은 어떤 불안정이다. 이미 베티 - 다이앤은 불확실한 실존적 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 영화의 위대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에 있지 않다. 도입부에 제시한대로 린치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무언가를 했다. 우리가 봐야할 것은 그가 무언가를 했는가이다.

오프닝의 커플들의 복제된 이미지들 사이로 베티-다이앤과 노부부가 떠오른다. 희미하게 겹치는 베티- 다이앤의 이미지는 그의 취약한 실존을 시각화한다. 하지만 동시에 화면의 z축에서 떠오르는 움직임은 역시 z축을 이용해 다가가는 1부와 2부의 분기점인 상자에 빨려들어가는 움직임과 연결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다른 의미로 쓰리디 영화다. 영화는 수직과 수평이 주를 이루는 영화의 축에 다가가고 떠오르고 멀어지는 z축을 추가했다. 이런 요소들은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영화임을, 정확히 말해 이미지와 카메라의 결합임을 드러낸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경이는 의미에 없다. 정확히 말하면 의미의 부재를 표현했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표현대로 사물화는 기표와 기의를 분리했으며 이제 의미(기의)마저도 문제시되었다. 이제 우리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칭하는 기표의 순수하고 무작위한 유희만이 남겨졌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개인의 실존적 불안을 드러낸 작품이기도 영화에 대한 영화기도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기표-이미지의 황홀하고 순수한 연결이고 유희이다. 거기에 린치는 새로운 영화의 정의를 찾은 것이다. 그렇기에 왜 베티 역으로 나온 나오미 와츠가 갑자기 일관성을 잃고

다이앤이 되었는지 묻는 것은 무익하다. 그보다는 그 기표들의 연결 자체에. 그 순수한 기표들의 접합에 집중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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