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 영화를 지나간 인연과 함께 극장에서 본 지도 거의 4년이 다 되어간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나에게 무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각인되어있다. 박찬욱이라는 감독의 대외적인 대표작들은 올드보이와 아가씨, 헤어질 결심과 어쩔수가없다일 것이다. 나에게 그의 최고작을 묻는다면 아마도 ‘
‘복수는 나의 것’과 ‘헤어질 결심’이 될 것 같다. 나로서는 놀라운 지점은 그의 영화에 비판적인 평을 하던 평자들조차 - 그들의 시선이 신뢰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차치하고- 높은 평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여기서 시작하고 싶다. 왜 ‘헤어질 결심’이 그동안 박찬욱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 그럼에도 그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감독이다- 를 하던 평자들도 매우 긍정적인 평을 남긴 영화가 되었을까.
박찬욱의 영화는 다채롭고 다면적인 영화다. 허문영이 박쥐를 두고 ‘다면적이고 중요한 영화’ 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말에 나는 동의한다.(그리고 나는 허문영이 22년 베스트에 ‘헤어질 결심을 올린 것- 국내 거의 모든 평론가가 그들의 베스트에 올렸지만- 을 보고 놀란다. 그가 연상호의 지옥을 그의 리스트에 선정했을 때 느낀 경악과 당혹, 실망과 정반대의 감정 역시 느낀다) 저 말은 박찬욱이 찍은 거의 모든 영화들에 적용되는 문제다. 박찬욱은 정말이지 다면적인 영화를 만든다. 나를 늘 경탄시키는 지점 역시 이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박찬욱의 영화를 싫어하는 이들의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여러 평들이 있겠지만 박찬욱의 영화를 제반하는 것이 (좁은 의미의)현실이나 리얼리즘이 아니라 그의 폭넓은 교양과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성이라는 사실도 크다고 본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영화는 ‘현실’이 아닌 그가 경험한 영화적/예술적 세계의 표상이고 ‘반영’이다. 박찬욱의 영화는 늘 영화언어에 매혹되어있는 자의 강렬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 다른 문제지만 타란티노가 그의 영화 속 세계를 그의 취향이 철저하게 녹아든 ‘영화로 구성된 세계’로 만든 것처럼 웨스 앤더슨 역시 그의 영화를 순전히 그의 예술적 감식안만이 작용하는 세계를 기반으로 직조하는 것처럼 박찬욱도 그렇다. 오도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영화는 ‘영화’임을 끊임없이 관객에게 주지하고자 혹은 과시하고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철저히 영화적인 세계에 속해있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그 역시 스타일리스트의 계통에 있는 자로서 가지는 특성- 그의 영화는 현실에 없다- 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헤어질 결심’이 다른 이유는 아마 박찬욱이 두 인물을 두고 그의 영화 속 인물들 중 가장 착한 인물들일 것이라는 농담에 있을 수도 있다. 영화의 해준과 서래는 현실에 발붙이고 있기는 하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이 발끝으로만 현실을 걸으면서 영화세계를 부유한다면 ‘헤어질 결심’의 인물들은 적어도 발바닥은 땅에 붙이고 서있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가 사랑이라는 테마를 (최소한 겉으로는)직접적으로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어질 결심’은 사랑이라는 불가해한 상태-감정- 생각-관념-기계를 정확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정성일이 남긴 코멘트-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가 맞다고 생각한다. 그의 영화에 대한 편벽된 시선들과 별개로 그의 영화에서 사랑은 주요했다. 판문점의 군인들과 복수 삼부작의 부모들까지 이 사랑은 단순히 이성-동성 간의 사랑만을 좁게 일컫지 않는다. 그렇다면 박찬욱에게 이 사랑이라는 것은 왜 주요한 테마들 중 하나로 존재하는가. 박찬욱이라는 중요한 감독(이 말에는 반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에 있어서 반복되는 주제가 있다면 ‘영화성’ ‘거리두기’ ‘경계’ ‘구원’ 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경계’라는 모티브를 보자. 그의 공동경비구역에는 남과 북, 성과 속, 선과 악, 피해자와 가해자, 질서와 혼돈 등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신형철의 표현대로 그는 부조리에 웃는 악마다. 하지만 그의 경계공간은 공동’경비’구역이지 비무장지대가 아니다. 그렇기에 폭력은 그의 영화 중심에 놓인다. 그리고 경계의 시공간은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지 않는다. 경계는 이것이면서 저것이지만 동시에 이것이 아니면서 저것이 아니다. 그런 불확실한 정체성과 불안정한 자아의 시공간이 경계이다.(이런 의미에서 그가 스파이라는 테마에 천착하는 것도 논리적이다) 여기서 사랑이 다시 등장한다. 요컨대 사랑만큼 기의와 기표가 표면과 실재가 어긋나는 것도 드물며 기의를 파악하지 못해 기표 사이를 헤매는 일도 찾기 힘들다. 그의 인물들은 기표가 기의와 동치될 수 없는 부조리한 경계에서 방황하는 인물들이다. 그렇기에 그 인물들은 자아가 희미하고 불투명하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그가 영화언어로 구성된 세계를 바탕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리라. ‘헤어질 결심’은 이 사랑이라는 테마를 (외견상)정면으로 다루는 듯 보이기에 영화언어로 구축된 그의 영화세계가 현실과 맞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에서도 사랑이라는 행위가 결국 기표를 통해 기의를 파악하려는 것이기에.
헤어질 결심을 두고 박찬욱의 ‘현기증’이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을 보는 동안 억누를 수가 없었다. 현기증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시선이다. 들뢰즈는 히치콕이 고전 영화와 현대 영화의 사이에 있으면서 운동- 이미지를 완성했다고 했다. 하지만 들뢰즈 스스로가 지적하는 것처럼 현기증을 비롯한 히치콕의 세계는 영화의 재현방식에 불균질함과 부조리를 내포하고 있다. 영화는 재현이라는 영상-비디오의 특징을 따라가면서 궁극적으로는 그 특징을 넘어서 영화라는 형식에 새로운 길을 연다. 이를 보여주는 장면은 현기증의 절정이다. 현기증의 클라이맥스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바로 시선의 불일치이다. 어둠의 실루엣으로 표현되는 마들렌- 주디를 카메라는 보여준다. 얼핏보면 이는 스카티의 시점쇼트로 보인다. 하지만 스카티가 일어서있음을 감안했을 때 아이레벨쇼트로 촬영된 마들렌 - 주디의 이미지는 이상하다. 위치가 맞지 않기에 영화는 은밀히 시선의 불일치를 만들어낸다. 영화의 내적원리로 보면 이 장면은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환상 - 기표와 실재- 기의의 차이를 표현하면서 스카티가 본인이 만든 환상에 경도되어 진실을 보지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간다면 이는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시각화한 것이면서 영화라는 매체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현기증이 영화에 관한 영화임은 모두가 주지하는 사실이지만 이 장면서 시선의 주체는 미묘하게 제거되고 시선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현기증은 이 장면으로 영화의 영화성을 각인시키고 있다. 다시 들뢰즈를 우회하자면 재현 불가능한 대상의 재현을 통해 현기증은 고전 영화와 현대영화의 사이에 위치하면서 전통적 재현과 이미지의 위기를 만들고 혁신시키고 있다.
‘시선’은 ‘헤어질 결심’의 중심을 이룬다. 영화는 ‘보다’를 강조한다. 더 나아가 영화는 그 시선의 대상이 주체가 되기도 한다. 행동으로써 시선이 제시된다면 동시에 그에 대한 반응으로써 다시 시선이 등장한다. 그것이 죽은 자의 것일지라도. 왜 이 영화에서 시선이 강조되고 있는가. 다시 현기증을 말하자면 현기증이 기표와 기의 사이에서 답을 찾지 못하는 자의 비극이기 때문에 그렇다. ‘헤어질 결심’역시 그렇다. 해준은 정확히 ‘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해준과 서래가 조우하는 시체 부검실 장면을 보자. 여기서 해준의 정면이 후경에 서래의 옆보습이 전경에 있다. 해준은 서래의 반만 보고 있다. 이 옆얼굴의 강조는 히치콕의 영화에 반복된 모습이다. 그리고 바다에 왔을 때 해준은 우측면 얼굴을 보여주고 있고 서래는 정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어긋난다. 재밌는 지점은 이 영화가 해준의 시점만큼이나 서래의 시점 역시 강조한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해준이 범인을 체포하는 장면을 서래가 경찰서에서 보는 시점쇼트다. 이 때 해준의 상징색- 노랑이 반짝이는 디테일도 흥미롭지만 서래의 시점쇼트 역시 영화가 채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해준은 인공눈물을 사용하고 망원경을 사용한다. 그리고 피해자의 눈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의 마지막 대사도 ‘조금 있으면 아무 것도 안 보여’이다. 들뢰즈는 히치콕을 두고 '보다'라는 행위를 중요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인물들의 시점쇼트만이 아니라 시체의 눈, 생선의 눈, 피로 가득한 물 등 다양한 사물들의 시점들이 등 이런 시점이 로우앵글로 인물들을 본다는 사실이다. 이 앵글은 교과서적으로 피사체를 강하게 만든다기 보다는 복수는 나의 것의 앙각과 유사하게 인물들을 위태하고 공허하게 만든다.그리고 이 로우앵글은 수직의 감각을 강조한다. 동시에 영화는 피사체와 사이에 장애물을 두고 피사체와 장애물이 겹치는 흡사 디졸브와 비슷한 느낌의 로우앵글숏을 자주 사용한다. 죽은 사물의 눈이, 피로 가득찬 물이, 사랑하는 이의 문자가 인물과 겹치는 이 연출은 죽음과 사랑에 일체화되어가는 인물들을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의 시선은 수직과 수평을 오간다. 수직은 어긋나는 소통, 수평은 정확한 소통의 형태이다. 서래와 해준이 수평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들(예로 1부의 마지막, 혹은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라는 대사가 나오는 장면)들은 사랑을 시각화하는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끝날 때 서래는 수직으로 내려간다.
영화에서 취조장면을 살펴보면 다각도의 앵글, 전자기기의 화면을 통한 분할을 적극 사용한다. 그리고 눈에 띄는 연출은 거울의 활용이다. 거울에 반사된 서래와 해준의 이미지는 수사,사랑이라는 합일화된 이중의 플롯을 시각화하기도 하지만 허상의 이미지를 표현한다. 거울,모니터 등으로 나오는 서래의 모습은 결국 허상이다. 해준은 허상의 이미지와 함께하고 있었다. 이 점은 영화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편집에서도 보인다. 해준이 서래를 관찰할 때 마치 해준이 서래와 함께 있는 것 같은 연결을 사용한다. 같이 있고자하는 마음의 표현이지만 나로서는 다르게 읽히기도한다. 그 장면은 결국 환상이다. 허상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안개라는 소재, 산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는 벽지 등등 결국 사랑인지 수사인지, 진심인지 허상인지 모르는 상황을 의미한다.
박찬욱의 카메라는 히치콕의 그것처럼 비인간적이고 전지적이다. 감정적으로 냉정하다든가 객관적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영화의 카메라워크와 편집에는 운명적인 힘이 있다.
영화는 달리숏, 인물들에게 다가가고 멀어지는 움직임을 자주 사용한다. 이는 인물들의 심리,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멀어지고 싶은 마음을 포착하는 카메라워크로서 그 강력한 힘을 시각화한다. 특히 서래가 해준의 집에 왔을 때 수평트래킹숏은 천재적이다. 이 때 카메라는 역방향으로 움직인다. 대다수의 감독들이 클로즈업으로 분할할 순간에 박찬욱은 역방향으로 이동하는 트래킹숏으로 그 강력한 사랑의 자장과 힘을 표현한다.
카메라 움직임이 마술적인 광휘를 발하는 순간은 1부의 마지막이다. 해준이 붕괴를 고백하는 장면서 영화는 오버 더 숄더 숏에서 달리를 이용해 해준의 싱글샷으로 전환한다. 해준은 어둠 속에 있고 락한다. 이 싱글숏은 그래서 외롭다. 그리고 해준이 떠나가는 순간 남은 서래를 보여줄 때 영화는 완전히 다른 순간을 포착한다. 카메라는 인물들로부터 멀어지고 보여준 적 없던 천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완전히 홀로된 서래를 비춘다. 다시 카메라는 수직으로 내려앉는다. 여태까지 보이지 않던 천장이 보이게하고 서래를 외롭게 만드는 이 움직임은 마법적인 힘- 그들이 완전히 다른 단계에 진입했음을 표현하는 -을 가지고 있다.
산에서의 사랑장면을 떠올려보자. 1부의 엔딩과 반대로 해준이 빛을 받고있고 서래가 어둠 속에 있다. 마침내 그들은 서로의 길을 따라와 사랑에 이르렀다. 기표와 기의의 합치일까? 그래서 그들은 구원까지 이를까.
안타깝게도 아니다. 해준은 사랑을 늦게 자각했고 그들의 사랑은 오묘하게 어긋났다. 서래는 그 자신의 존재를 미결로 만들어 해준을 사랑에 가두고자한다. 그리고 이는 파멸은 전제한다.
주차하는 차를 높이서 잡은 부감은 그래서 아름답고 황홀하다. 운명 혹은 사랑 아래에서 그들, 특히 해준은 얼마나 연약한가. 박찬욱이 비극적인 순간에 사용하는 이 직부감숏은 명확하게 불가능한 구원을 드러낸다.
영화는 2.39:1을 절묘하게 활용한다. 이 비율을 사용한 클로즈업은 보통의 그것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고 감정을 곡진하게 담는다. 눈 클로즈업에 담긴 박해일의 눈이 얼마나 깊던가. 동시에 클로즈업 후 나오는 마스터숏이나 롱숏은 인물들을 운명앞에 사랑 앞에서 작아지고 약하게 만든다. 영화는 수직과 수평 이외에도 대각선을 오묘하게 섞어가며 영화의 리듬과 입체성을 다채롭게 살린다. 동시에 박찬욱은 머그샷을 활용해서 전경에 인물을 두고 후경에 배경을 배치한다. 이 구조는 관객이 알지만 인물은 모르는 영화의 극적 아이러니를 담아낸다.
푸른 저녁의 바닷가를 헤매는 해준을 담아내는 롱숏은 처연하고 너무나 아름답다. 그는 서래의 색인 파랑에 완전히 잠식되어있다. 결국 그도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는 걸작에 이르렀다.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