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페이버릿을 보며 연상되는 영화는 게임의 규칙이다. 거대한 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상류층과 하류층의 이야기, 중간중간 삽입된 사냥장면 등등 이 영화는 장 르누아르의 걸작과 많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게임의 규칙의 유명한 대사라면 '사회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어'일 것이다. 더 페이버릿에서 이에 상응하는 대사는 사라가 궁을 떠나며 아비가일한테 하는 대사인 '너와 나는 다른 게임을 했어'이다. 사라의 대사대로 아비가일과 사라의 게임은 달랐다. 아비가일은 권력을 추구했고 사라는 (의외로)사랑에 진심이였다. 여기서 더 페이버릿은 게임의 규칙과 겹친다. 게임의 규칙 결말부에서 죽는 자와 죽인 자는 유이하게 진실되게 사랑한 사람들이였고 그랬기에 추방되었다. 더 페이버릿 역시 마찬가지다. 게임의 세계에 사랑은 필요없다.
더 페이버릿에서 두드러진 촬영은 바로 광각렌즈,어안렌즈의 적극적 사용이다. 광각렌즈는 화각이 넓고 심도가 깊으며 왜곡이 심하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이를 통해 이 세계를 정확하게 담아내었다. 광각은 화각이 넓어 배경이 크게 피사체는 상대적으로 작아보이는데 이는 소유한 권력에 비해 보잘것없는 인물들을 표현한다. 심도가 깊어 광각은 동시에 피사체들을 선명하게 잡아내며 공간감을 살리는데 여러 인물들이 맺는 관계와 공간이 중요한 이 영화에 걸맞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광각은 피사체들 사이의 거리를 멀어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같이 있으면서도 서로를 적대하기도 하는 인물들에게 맞는 연출이다. 광각의 특징으로 생기는 왜곡효과도 이 영화에 어울리는데 그야말로 어딘가 뒤틀리고 이상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이루는 세 인물들은 모두 권력과 사랑의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 양상은 사뭇 다르다. 앤은 처음에는 사랑만을 신경쓰는 듯 보이다가 나중에 권력의 세계로 들어가는 인물이고 아비가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권력을 추구한 인물이다. 반면 사라는 권력을 위해 앤을 이용하는 듯 보였으나 종국에는 사랑을 위해 행동하기도 했음이 드러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앤과 아비가일을 중첩시킨다는 것이다. 초반부 아비가일이 양잿물에 당한 이후 영화는 고통스러워하는 앤을 곧바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둘이 친해지는 계기가 화상이라는 점과 앤의 고통을 상징하기도 하는 토끼라는 설정은 앤과 아비가일의 공통점을 부각시킨다. 이 둘은 과거에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해서 이 둘이 같다는 등식이 성립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둘의 급속도로 전진된 관계를 설명해준다..)
더 페이버릿은 지속적으로 로우앵글을 강조한다. 이는 로우앵글에 대한 교과서적인 설명대로 인물들의 힘을 강조시켜 위화감을 주기도 하지만(광각렌즈와 결합함으로써) 동시에 인물들을 불안정하고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무엇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로우앵글은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며 수직감(로우앵글은 필연적으로 위아래의 차이를 느끼게한다)을 드러내 권력의 테마를 표현한다.
사라가 궁을 떠나면서 앤과 나누는 대화는 매우 인상깊다. 그들 사이에 있는 두꺼운 문은 이미 틀어진 그들의 관계에 대한 묘사이며 그들 둘이 처해있는 환경은 다르다. 앤은 환한 빛 속에 있고 사라는 어둠 속에 있다. 이 때 앤은 이미 권력의 세계에 있고 사라는 사랑의 세계에 있다. 이미 그들이 속한 세계가 다르고 하는 게임이 다르다.
이 영화에서 인상깊은 장면은 단연코 라스트씬이다. 토끼를 밟고있는 아비가일이 나오는데 여기서 토끼는 (역시 앤을 떠나간)사라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앤의 상처인 자식들과 겹치는 토끼를 밟고 있다는 사실은 아비가일이 사랑이 아닌 권력을 탐하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곧바로 아비가일은 앤의 다리를 보살펴야하는 '을'의 자리로 회귀한다. 그리고 앤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누른다.
아비가일이 앤의 다리를 주무르는 장면서 앤과 아비가일의 얼굴은 같은 프레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각의 프레임에 외롭게 있다. 특히 망원렌즈를 활용한 로우앵글은 앤의 그것을 애잔하게 드러낸다. 엔딩씬에서 디졸브되어서 그들의 얼굴이 겹치는데 이는 이들 둘의 연대가 아닌 이들의 공통점을 강조하는 것에 가깝다. 즉 여기서 처음 교차편집과 같이 앤과 아비가일은 중첩된다. 그 둘 모두 비정하고 비인간적인 권력의 세계에서 고독하게 남아있는 존재다. 같이 디졸브되는 토끼의 이미지 역시 이를 표현한다.
송곳니와 더 랍스터, 킬링 디어와 더 페이버릿까지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시스템과 체제의 폭력성과 공포, 그에 무력한 인간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서 더 페이버릿은 킬링 디어에 이은 또다른 그의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