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장애인, 지방, 외국인, 노인, 능력주의 갈등 총정리
내가 이번 대선에서 ‘절대 뽑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사람은 이준석 후보였다. 동덕여자대학교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를 “사회질서를 훼손하는 행위”라고 비난하고, 여성가족부를 “아무 역할 없는 부처”라고 말하며, 지역별로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자는 그를 지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의 생각과는 달리 이준석은 최종 득표율 8.34%, 특히 20대 남성 37.2%의 표를 얻으며 높은 지지를 이끌어냈다. 꽤나 충격적인 결과였다. 이준석의 정치 전략이 특정 집단에 분명히 통했음을 실감했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 ‘차별받지 않고 일할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 와 같이 오랜 세월 갈등 끝에 도출해 낸 합의가 요즘 들어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준석의 정치는 단순히 개인 선호를 넘어 사회 전체의 분열을 확대하고 있다. 그는 다양성, 공존 같은 가치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모든 이슈를 대립 구도로만 바라본다. 이 글에서는 20대 여성의 관점에서 그의 정치적 행보가 왜 문제인지 정리하고자 한다. 이준석식 정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준석이 호명하는 ‘여성’
이준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안티 페미니즘’적 입장이다. 그만큼 여성 의제에 대해 차별적인 언행을 반복해 왔다. 한 예로, 과거 이준석은 “20대 여성은 어젠다 형성에 뒤처지고 추상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과는 달리, 실제 20대 여성은 낙태죄 폐지 시위, 불법촬영 규탄 시위 등 각종 사회적 논란이 있을 때마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이들의 참여는 입법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의 발언은 20대 여성의 정치적 역량을 축소할 뿐만 아니라, 여성 유권자 전체를 과소평가하는 시선을 보여준다. 이후 여러 비판이 있었음에도 그는 자신의 발언에 대해 정정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이는 여성 유권자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태도로 보인다.
대선 토론에서 여성 신체에 대한 부적절한 발언은 많은 비판을 받아 마땅했다. 성폭력을 떠올리게 하는 발언은 많은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나는 이러한 발언이 방송 내 혐오 표현에 대한 수위 기준을 낮출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방송 이후 그는 “표현의 수위로 인해 상처받으신 모든 분께 깊이 사과드린다”라고 했지만, 동시에 “그 발언을 제가 그대로 옮겨서 전하는 것 외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마치 ‘문제 지적’이라는 ‘대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러한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2016년 있었던 강남역 살인사건을 두고는 “여자라서 죽었다는 젠더 프레임이 잘못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신 나간 사람이 죽였는데, 그걸 젠더로 치환하는 건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애초에 가해자는 화장실에 숨어 피해자를 여자로 특정했고, “여자들이 항상 나를 무시했다”라고 진술했다. 이를 고려하면 단순히 ‘정신질환자의 범행’으로 축소하기는 어려운 점이 많다. 또한 이준석의 말은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을 ‘피해의식’ 정도로 치부한다는 점에서도 문제이다. 이는 여성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무시하고, 실제 벌어지는 범죄를 축소하는 해석이다. 이 사건에 대해 숙명여대 법학과 홍성수 교수는 이를 혐오범죄가 아니라고 단언하는 것은 섣부르다며, “만약 편견의 동기가 지배적이지 않아서 법적 혐오범죄가 성립하지 않았다고 해도 여성혐오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준석의 차별적 시각은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준석은 여가부를 통일부와 함께 “아무 역할 없는 부처”라고 말하며 폐지를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것과는 다르게 여가부는 한국 사회의 성차별 해소와 함께 성폭력, 가정폭력 예방 및 피해자 지원, 청소년 보호, 다문화 가족 지원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아무 역할이 없다고 하기엔 하는 일이 많은 편이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여전히 여러 방면에서 남성과 비교해 차별받는다. 성폭력 피해자의 약 90%가 여성이고, 성별 임금 격차는 OECD 1위(32.2%), 유리천장 지수도 최하위, 여성 임원 비율 6%, 여성 국회의원 비율 19.1%로 OECD 평균에 크게 못 미친다. 그는 실제 존재하는 차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부처가 설립된 지 오래 지났는데도 양성평등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은 가능하지만, 아예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극단적이다.
그는 동덕여대 시위를 “사회질서를 훼손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비난하기도 했다. 시위가 “서부지법 폭동과 본질이 같다”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이는 본질을 왜곡하고 적대감만 키우는 접근이다. 동덕여대 시위의 원인은 학교 측의 비민주적 운영과 학생 의견 배제에 대한 저항이다. 방식에 대한 비판은 할 수 있어도, 이미 여론을 통해 충분한 비판이 이뤄진 상황에서 학생들을 ‘폭도’로 몰고, 정치권에서 비난까지 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학생들의 시위에는 납득 가능한 이유가 있다. 동덕여대는 사학비리, 세습 및 사유화, 총장 직선제 미도입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학생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했으나 개선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시위는 대학의 오랜 불통에 대한 피로가 누적된 결과로써 봐야 한다. 하지만 이준석은 방식만을 문제 삼았고, 학생들에게 ‘폭력’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정치인으로서 갈등 봉합이나 해결의 책임을 방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장애인 권리 침해
소수자에게만 유독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이준석의 태도는 ‘장애인 지하철 시위’ 발언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시위에 대해 “공공을 인질로 잡은 투쟁은 연대가 아니라 인질극”이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장애인 이동권 시위는 단순한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외면받아온 이동권 보장을 촉구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들이 정말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시위했을까? 그들 역시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시위하면 따가운 시선을 받고, 여러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 요구는 20년 넘게 이어져 왔지만, 정부와 지자체의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결국 출근길 지하철 시위는 사회적 주목을 받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시위 이후에 언론 보도와 공론화가 이뤄졌고, 장애인 이동권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자리 잡았다.
이준석에게 묻고 싶다. 시위가 일어나기 이전에 장애인 이동권 보장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가? 그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시위를 하기 전에, 그리고 소수자에 대한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기 전에 정치인으로서 먼저 관심을 기울였어야 했다. ‘볼모’, ‘인질’, ‘비문명적’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시민 VS 장애인’의 대립 구도를 만들어서는 안 됐다. 정치인이라면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채, 갈등을 정치적 무기로 삼는 태도는 가장 큰 문제로 보인다.
‘지방 VS 수도권’, ‘외국인 VS 내국인’
그가 공약으로 내세운 지역별 차등 임금제와 외국인 노동자 최저임금 차등제 역시 문제다. 한국은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이라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런데 이준석은 이런 상황에서 지역별로 최저임금을 다르게 하고 주장했다. 경제 활성화와 고용 창출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 그렇게 작동할지는 의문이 든다. 이미 수도권에 일자리가 몰려있는 상황에서 차등 임금까지 도입한다면, 지방의 노동자들은 당연히 더 높은 임금을 찾아 수도권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방 경제의 침체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또한 특정 지역의 최저임금이 낮아지면 해당 지역이 ‘저임금 지역’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어 이미지가 훼손될 우려도 있다. 이준석이 하고 싶은 것이 서울공화국인지, 지방 소멸을 막는 건지 의문이 든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임금 차별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이는 명백한 차별이며 법률, 국제적 협약의 위반이다. 국적에 따라 임금을 차등 적용하는 것은 근로기준법(제6조), 외국인고용법(제22조), 헌법(평등권), 국제노동기구(ILO) 제111호 협약(차별금지) 등에 위배 된다. 이준석이 예시로 든 캐나다의 외국인 노동자 차등 임금 제도는 2012년 도입 1년 만에 폐지되었으며,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내국인과 외국인에게 동일한 최저임금을 적용하고 있다. 향후 몇십 년 안에 인구 피라미드가 무너질 것이 예상되는 한국에서 임금까지 차별한다면 누가 일하러 들어올까? 어떤 외국인이 한국에 세금을 내며 살고 싶을까? 이러한 차별적 대우는 사회적인 갈등뿐 아니라 국제적인 비난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하다. 더 나아가 외국인 차별은 타국에서의 한국인 차별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준석은 이 문제에서도 ‘내국인 VS 외국인’의 대결 구도를 만들었다. 노동시장 구조를 개선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노인은 ‘특혜를 누리는 세대’?
이준석은 노인 정책에서도 대결 구도를 만든다. 그는 “무임승차는 오히려 불공정”이라면서 65세 이상 무임승차를 없애고 연 12만 원 선불 교통이용권을 주자고 주장했다. 선불 금액이 소진된 이후에는 청소년 요금과 비슷한 약 40% 할인율을 적용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하철 무임승차 적자가 노인의 무임 혜택 때문이라고 본다. 정부의 재정 지원 부족이나 교통 운영 구조 같은 다른 원인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노인들이 마치 ‘특혜를 누리는 세대’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이는 세대 갈등을 조장하는 조치이다.
이런 정책을 정말 실현했을 때, 생길 수 있는 부작용도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이 1위이며, 노인 자살률 역시 압도적으로 높은 나라이다. 교통비 천 원, 이천 원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생계와 사회적 이동과 직결되는 생존권의 문제일 수 있다. 노인들의 사회적 고립을 심화시킬 가능성도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 또한 오히려 행정비용이 더 들 수 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관리 시스템 구축, 선별을 하는 절차는 무료가 아니다. 설령 불가피한 상황이라 복지를 축소시켜야 한다고 해도, 다른 대책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정치인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이준석이 말하는 ‘능력’, ‘공정’ 중심 사회
그는 공정과 능력주의를 강조하며 각종 할당제의 폐지도 주장했다. 2021년 경선 공식 인터뷰에서 그는 “장관에 여성 많이 임명한다고 여성 삶 나아지냐. 공정한 경쟁을 막는 할당제는 반대한다. 지역 배분이나 청년, 여성, 장애인 지역 배분 할당제도 반대.”라고 말했다. 이보다는 ‘공정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을 절대 소수자로 몰아넣고 캠페인 하는 방식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며 지역, 성별 등에 대한 할당을 모두 능력주의로 대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공정한 환경을 만드는 것은 중요하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공정한 환경’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말로 이뤄질 수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모두가 평등하게 노력할 수 있는 환경을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공정한 출발선이라는 관점은 오히려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더 가깝다. 할당제는 이미 벌어진 격차를 일부 조정하는 장치이다. 특혜라고 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공무원 채용에 저소득 전형이 있는 이유는 저소득층은 교육 기회나 사교육 등 시험에 필요한 자원에 접근하기 더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있는 불평등을 최소한 바로잡기 위함이며, 통합과 다양성에도 기여한다. 그리고 실제 소수자의 삶이 변화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준석의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필요하다. 능력주의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나 불평등을 정당화할 위험이 있다. ‘공정하다는 착각’의 저자 마이크 샌델은 능력주의가 “우리가 성공(또는 패배)을 해석하는 방식에 잘못된 영향을 준다.”라고 지적했다. “성공과 실패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설명할 수 없고 사회·경제적 조건, 운, 시대적 배경 등 다양한 요인의 결과”로 봐야 한다. 하지만 이준석은 여러 불평등 문제를 구조적으로 바라보기보다 개인의 노력과 능력의 문제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태도는 논의를 발전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불평등과 차별을 심화시킬 수 있다. 이준석은 알아야 한다. 본인이 하버드에 합격하고,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노력 외에도 경제적 조건, 시대적 환경, 그리고 운이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노력’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가진 것은 아니다. 진정한 공정을 말하고 싶다면, 운과 여러 가지 유리함을 먼저 인정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준석이 제시한 분노의 방향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힘들게 만든 것은 여성이 아니다. 장애인이 아니다. 외국인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구조적 불평등과 기회를 가로막은 기득권, 그리고 이를 해결하지 못한 정치에 있다. 특정 집단을 적으로 설정하고 분노를 쏟는다고 해서 사람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 갈등을 유발하기보다 우리 모두의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있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정치란 사회적 희소가치를 배분하는 일을 말한다. 자원은 한정적이기에 경쟁은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이 누군가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이준석은 갈등을 이용함으로써 정치적 기반을 다져왔다. 하지만 정치가 할 일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것이지, 갈등을 심화시키는 게 아니다. 그의 방식은 일시적인 정치적 이득을 가져올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연대와 신뢰를 무너뜨리고, 혐오가 일상화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공존과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를 복원하는 것이다. 정치의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