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탁동시(啐啄同時)

- 담장은 무너져야 합니다.

by 봄솔


장마철이 오면 어김없이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어린 시절 앞집과 경계를 이룬 우리 담장이 장맛비에 무너져 내리던 날이지요.
무너진 담 너머로 앞집의 뒤꼍과 마루가 훤히 드러났고,
내 또래의 여자아이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요.
그날부터 우리는 소꿉동무가 되었답니다.

무너진 담장을 넘나들며 사금파리로 그릇을 만들고, 흙을 이겨 밥과 떡을 빚던 시간.
빗물이 흙냄새와 섞이던 그 여름은 내 어린 날의 가장 밝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여름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와 앞집 아저씨가 담을 새로 쌓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들이 흙을 반죽하고 돌을 나르니 처음엔 함께 소꿉놀이를 하는 것처럼 신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넘나들 수 없을 높이로 담이 쌓이자, 그 아이와 나는 우리 마당으로 소꿉놀이 장소를 옮겨야 했습니다.
해 질 무렵, 담쌓기가 마무리되고 아버지는 그 아이를 두 손으로 번쩍 안아 담 너머로 그 아이 아버지께 넘겨주었습니다.
그것이 그 아이와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 집은 담 하나 너머 앞집이지만 대문에 이르려면 골목을 몇 구비 돌아야 해서 어린 우리로서는 오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해 겨울, 어머니가 두부 한 모를 담 너머로 건네며
“서울 가서는 잘 살아라.” 하시던 울먹임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습니다.

그 후로 장맛비가 내릴 때면,
무너진 담장과 사금파리, 담을 넘으면서 나를 바라보며 웃던 그 아이의 얼굴이 빗속에 어른거립니다.
그 담장은 나에게 ‘이별과 그리움’의 상징이 되었지요.


세월이 흘러 이제 나는 또 다른 담장 앞에 서 있습니다.
이번엔 흙과 돌이 아닌 마음의 담장입니다.
딸과의 작은 다툼에서 시작된 벽이 어느새 굳어버려,
서로의 말이 닿지 않게 되었지요.
처음엔 내 잘못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벽의 한쪽은 결국 내가 세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쪽의 벽을 먼저 헐어보았습니다만 딸은 여전히 벽을 치고 있습니다.

마음의 담장은 혼자서는 허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어미닭과 병아리가 안팎에서 동시에 껍질을 깨야 새 생명이 나오듯,
서로의 마음이 동시에 움직여야만 무너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종종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담장이 내가 넘을 정도로 낮았더라면,
혹은 작은 쪽문이라도 만들어 두었더라면
그 아이의 하얀 얼굴과 깔깔대던 웃음소리를 더 오랫동안 보고 들었을 텐데 하고요.


사람 사이의 담장도 다르지 않습니다.
조금만 낮추고, 작은 틈 하나라도 열어 두면
그 사이로 바람이 넘나들고, 햇살이 비치고
마침내는 오랜 오해와 서운함이 녹아내리겠지요.


오늘도 가늘게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조용히 빌어봅니다.

내 마음의 담장도 빗물에 스르르 무너져,
그 자리 위에 다시 평화의 뜰과 사랑의 정원이 자라나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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