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높다.”
“눈이 높다.”
이 말은 단순히 기준이 높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안목이 높다는 긍정적 의미와 주제넘다는 부정적 의미 외에 눈이 높아질수록 높은 곳은 보지만 낮은 곳은 간과할 수 있다는 경계의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점심시간에 식당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즐겁고 분주하다. 보통 12시 10분부터 교직원 배식이 시작되고, 곧이어 병설유치원 원아들, 그리고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학년 순으로 배식받는다. 조금 늦으면 유치원 아이들 뒤거나 1학년 줄 뒤에 서게 되는 때도 있다. 오늘도 조금 늦어 유치원 아이들 줄 뒤에 서게 되었다.
내 앞에 서 있던 원아가 나를 돌아보고 방긋 웃으며 인사하더니, 두 팔을 들어 내 배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고는 또렷하고 맑고 높은 목소리로
“선생님, 왜 배가 이렇게 많이 나왔어요?” 했다.
순간 주변에 있던 교사들과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 선생님은 “지현아, 선생님 배 안 나왔어.” 하며 웃으셨고, 다른 분은 “아이고, 저 녀석 배가 더 부르구먼.” 하고 장난스럽게 말씀하셨다. 나도 웃으며 “지현아, 너도 밥 많이 먹으면 이렇게 크고 배도 나오고 그래. 밥 맛있게 많이 먹어.” 하고 말했다.
지현이가 어떤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한 말이 결코 아닐 거다. 그 아이 눈엔 내 배가 분명 불룩 나온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순수한 관찰에서 비롯된 말이었지만,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사실 내 체격은 평균적이다. 키 173센티미터에 몸무게 70킬로그램, 근육량도 적지 않아 특별히 배가 나온 편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아이의 눈에는 그리 보였나 보다.
지현이의 키는 내 배꼽 언저리에 닿을 정도다. 그 아이의 눈높이에서 보면 내 배가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을 것이고, 그것이 마치 자신을 압도하듯 크게 느껴졌음에 틀림없다.
문득, 어린 시절 넓디넓은 학교 운동장에 서 있던 느티나무가 떠올랐다. 그렇게도 크고 웅장하게 느껴졌던 나무였지만, 수십 년이 지나 다시 찾은 학교에는 좁은 운동장에 초라한 느티나무 한 그루만이 서 있었다.
“에게, 이게 정말 그 나무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그때 느꼈던 실망감은 내 어린 시절 꿈들이 가뭇없이 사라진 것처럼 허탈했다. 어릴 적 내 시선으로 보았던 것들이, 키가 큰 뒤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던 것이다.
감각의 변화는 시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각도, 청각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예전에는 밤양갱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달고 맛있다고 느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훨씬 더 자극적인 단맛에 익숙해져, 밤양갱의 담백한 맛은 도무지 단맛으로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군 복무 시절엔 밤에 듣는 천둥소리는 과장하여 말하면 자장가 정도였다. 어린 시절 무섭기만 했던 그 소리가 총, 포소리를 경험하고 나니 오히려 평온하게 들렸던 것이다. 감각은 그렇게, 경험이 쌓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둔감해지고 변화한다.
감정 역시 그런 것 같다.
부모님에 대한 애도의 마음도 해가 갈수록 시나브로 옅어지는 느낌이다. 처음 몇 해 동안은 산소에 오를 때 집사람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빨랐었는데 요즈음은 집사람보다 늦게 오를 때도 있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 대부분 당첨되고 몇 달간은 행복감에 젖지만 곧 시들해지고 그 이후에는 그 어떤 일에도 쉽게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결국 만사가 하찮게 여겨져 오히려 불행해지게 된다는 분석도 있다. 작고 소소한 행복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로또를 사면서도 당첨에 그리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걱정스러운 것은, 이런 감각과 감정의 변화가 개인을 넘어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세월호와 강남역 사고, 코로나 등 크나큰 일들이 계속되다 보니, 사람들은 감각이 점점 무뎌지는 것 같다.
수백 명이 희생된 사고를 접한 뒤에는, 수십 명이 다친 사건쯤은 그다지 놀랍지 않은 모양이다. 언론도 그런 것 같다. 사건 사고가 연이은 면도 있지만 보도하는 데 급급할 뿐이고 대중들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정치, 경제 문제에 비중을 더 두는 것 같다.
더 많은 숫자, 더 큰 자극, 더 엽기적인 사건에 익숙해진 사회. 어느새 우리는 그런 사회에 살면서 아무런 비판 없이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감각과 감정의 둔화는 결국 사회를 더 삭막하게 만들고, 인간 본연의 감정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변화를 민감하게 인식하고 되짚어보는 일이다.
'내가 사랑한 유럽'의 저자 정여울은
“세상을 보는 눈은 자란다. 그러나 그 눈이 커질수록, 놓치는 것 또한 많아진다.”라고 했다.
저자가 말한 ‘놓치는 것’이란 단순한 정보가 아닌, 우리가 느껴야 할 감정, 공감, 그리고 삶의 온도일지도 모른다.
지현이의 말은 단순한 외형에 대한 관찰이었지만, 그 말로 인해 내 감각과 감정의 변화를 되돌아보게 했고 세상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에 대한 내적 질문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바른 눈높이와 바른 마음 온도, 바른 생각 깊이로 세상을 다시 보고 느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이 말해주는 작은 신호들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다.
감정이 무뎌지는 시대일수록, 작고 여린 감정 하나에도 더 깊이 귀 기울이는 자세를 갖추어야겠다.
어느 날엔가, 지현이가 훌쩍 자라 내게 이렇게 말해주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선생님, 예전보다 더 멋지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