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누군가의 스마트폰 액정이 거미줄처럼 갈라져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혀를 차곤 했다. ‘조금만 조심하지.’ ‘물건을 참 험하게 다루네.’ 그 무구한 오만함은 10년 넘게 단 한 번도 휴대폰을 떨어뜨려 본 적 없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가장 방심한 순간에 매서운 교훈을 던진다.
그날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한 달 가까이 애를 먹이던 중고 미용기기가 44만 원에 팔린 직후였다. 당근 거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내 발걸음이 저절로 가벼워졌다. 점퍼 주머니 속에 넣은 휴대폰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는 걸 감지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설마 빠지겠어?’라는 안일함. 나는 나이도 잊은 채 아스팔트 위에서 살짝 점프를 했다.
‘툭-’
경쾌하지 못한, 둔탁하고도 서늘한 소리가 고요한 저녁 공기를 갈랐다. 뒤를 돌아보니 나의 분신과도 같은 휴대폰이 차가운 도로 위에 엎드려 있었다. 뒤집어 확인하는 그 몇 초의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들어 올린 화면은 이미 ‘파파박’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지른 뒤였다. 보호 필름이 붙어 있으니 괜찮을 거라는 자기 최면을 걸며 급히 주머니에 쑤셔 넣고 집으로 뛰어왔다. 확인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미루고 싶었던, 비겁한 도망이었다.
집에 돌아와 밝은 불빛 아래서 마주한 진실은 참혹했다. 단순히 유리만 깨진 것이 아니었다. 내부의 액정이 파손되어 검은 잉크가 번진 듯 화면 일부가 어둠에 잠겼고, 기기 사이드에는 회생 불능을 알리는 구멍들이 패어 있었다. 속상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단순히 물건이 망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타인의 부주의를 탓하던 나 자신의 오만함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예기치 못한 지출에 대한 상실감이었다.
수리비를 검색해 보니 약 30만 원. 방금 전 미용기기를 팔아 얻은 44만 원의 기쁨이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신기루처럼 사라질 위기였다. “돈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나갈 구멍이 생기는구나.”라는 옛 어른들의 말씀은 틀린 게 하나 없었다.
진짜 비극은 그날 저녁부터 시작되었다. 오후 7시가 넘은 시각이라 서비스센터는 이미 문을 닫았고, 나는 스마트폰이라는 ‘외장 뇌’를 잃어버린 채 밤을 맞이했다. 평소 당연하게 하던 주식 앱 확인은커녕, 노트북으로 포털 사이트에 로그인하려 해도 ‘휴대폰 인증’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막혔다. 내가 나임을 증명할 길이 사라진 것이다.
아이의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관리하던 ‘패밀리 링크’ 또한 내 기기와 연동되어 있었기에, 아이 역시 휴대폰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나보다 더 슬퍼하는 아이를 보며 미안함과 서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잠들기 전, 습관적으로 맞추려던 알람마저 불가능했다. 결국 아이의 탁상시계를 빌려 머리맡에 두었지만, 초침 소리에 예민한 남편의 타박이 돌아왔다. 스마트폰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우리 집의 평화와 질서가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은 흡사 서바이벌 게임 같았다. 버스 앱이 없으니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어디쯤 오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막연하게 정류장에 서서 전광판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늘 스마트폰 페이로 간편하게 결제하던 습관 때문에 지갑 속 실물 카드를 꺼내는 것조차 어색하고 낯설었다.
버스 안에서의 풍경은 더욱 기이했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작은 화면 속에 침잠해 있을 때, 나만 홀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버스 안의 모든 광고판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스쳐 지나갔을 창밖 풍경, 사람들의 표정, 길가의 간판들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감각의 안테나가 평소보다 훨씬 예민하게 세워졌다.
하지만 그 예민함은 '여유'라기보다는 '불안'에 가까웠다. 내려야 할 정류장을 카카오맵이 알려주지 않으니, 나는 끊임없이 내 위치를 스스로 확인해야 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 작은 기계에 모든 감각과 인지 능력을 위탁해 온 것일까.
회사에 도착해서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오전 9시, 서비스센터가 문을 열기만을 기다리며 머릿속으로 최단 동선을 그렸다. 급한 업무를 처리하고 양해를 구한 뒤 뛰어간 서비스센터에서 대기하고 수리하는 40분. 그 시간은 내 삶의 톱니바퀴를 다시 끼워 맞추는 정비 시간이었다. 마침내 수리가 완료되고 화면이 밝게 빛날 때, 비로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밸런스가 돌아온 것이다.
이번 사건을 겪으며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제 스마트폰은 단순한 ‘소지품’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내 신체의 일부이자, 사회적 신분증이며, 타인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다. 휴대폰이 없으면 은행 거래도, 인증도, 메일 확인도 할 수 없는 세상. 이것은 불편함을 넘어선 ‘사회적 마비’를 의미한다.
영국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and Years)>에서는 손가락 사이에 통신 칩을 이식하는 10대들의 모습이 나온다. 예전엔 그 장면을 보며 기괴하다고 생각했지만, 액정이 깨진 하루를 보내고 난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무형의 칩을 뇌 속에 이식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 물리적인 형태가 손바닥 위의 유리 기기일 뿐이다.
앞으로 몇 년 후, 혹은 몇십 년 후에는 정말로 칩을 이식하거나, 육체가 소멸하더라도 뇌의 데이터를 이식해 영생을 꿈꾸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뒷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인간의 본질이 육체가 아닌 ‘데이터’와 ‘연결’에 정의되는 시대. 그 거대한 흐름의 전초전이 바로 내 손 안의 액정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30만 원이라는 거금과 하루의 소동을 치르고 얻은 깨달음은 씁쓸하면서도 명징하다. 나는 더 이상 스마트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이 기계와 공생하는 ‘호모 스마트포니쿠스’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액정이 깨지는 순간, 깨진 것은 유리뿐만이 아니었다.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아가던 나의 나약한 민낯도 함께 금이 갔다. 편리함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포기하고 있는 것들—기다림의 미학, 스스로 길을 찾는 법, 초침 소리를 견디는 정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오늘 밤은 스마트폰을 잠시 멀리 두고, 아이의 탁상시계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려 한다. 비록 남편은 시끄럽다고 투덜대겠지만, 디지털 알람이 아닌 물리적인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그 소리가 오늘따라 지극히 인간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