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거대한 급류에
기꺼이 휩쓸린다는 것

소설 <급류>를 읽고

by moonconmong

2025년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필 때마다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던 이름이 있었다. <급류>. '언젠가는 꼭 읽어봐야지' 하고 마음 한구석에 갈무리해 두었다가 잊어버리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문득 그 제목이 다시 마음을 두드렸다. 그리고 책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 깨달았다. 이 소설이 가진 흡입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왜 수많은 독자가 이 거친 물줄기에 몸을 맡겼는지 말이다.


소설은 진평강 하류에 떠오른 두 구의 시체로부터 시작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발견된 남녀. 작은 동네에 이 소식은 비극보다 자극적인 가십으로 먼저 소비된다. 소문은 결코 진실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눈덩이처럼 불어나 당사자들의 삶을 짓눌러버릴 뿐이다. 발견된 시체는 창석과 미영, 바로 주인공 도담의 아빠와 해솔의 엄마였다.


누군가는 사랑이 교통사고 같은 거라고 했다. 그래, 교통사고 낼 수도 있다 치자. 그런데 책임도 안 지고 벌도 안 받으면 그건 뺑소니잖아. 가족을 속이고 상처 입히는 게 사랑이라면 도담은 사랑을 인정할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해서 찌그러트리고 싶었다.


뭘 해도 재미있을 나이인 고등학생 도담에게, 서울에서 전학 온 해솔과의 만남은 싱거운 일상의 유일한 청량함이었다. 하지만 부모들의 비극적인 죽음은 두 사람의 풋풋한 첫사랑을 '불륜의 자식들'이라는 낙인으로 바꿔놓는다. 축복받아야 할 감정은 순식간에 죄책감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도담에게 사랑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니게 된다.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급류>는 이처럼 10대의 어느 날, 거대한 급류에 휩쓸려버린 두 남녀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고 회복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존경하고 사랑했던 부모가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사라졌을 때, 남겨진 아이들은 어떻게 삶을 지탱할 수 있을까.

소설 속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를 견뎌낸다. 때로는 사랑을 부정하고, 때로는 사랑을 이기적인 욕망이라 치부하며 마음의 문을 닫는다.


사랑이란 건 거대한 마케팅 같아요. 제가 보기엔 잘 포장된 욕망과 이기심인데. 자기들 멋대로 핑크빛으로, 하트 모양으로 정하고, 그게 장사가 되니까요. 사과 로고처럼.

하지만 냉소 뒤에 숨겨진 진심은 여전히 서로를 향한다. 7년이면 몸의 모든 세포가 교체된다는 말처럼, 시간이 흘러 겉모습은 어른이 되었을지 몰라도 그들의 중심에는 여전히 진평강의 차가운 물살이 흐르고 있었다. 도담과 해솔은 서로에게 "네가 사랑해라고 하는 말이 이젠 미안해라고 들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아픈 시간을 통과한다.


이성에 대한 열정? 호르몬 작용은 진작 끝났다. 소식이 궁금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걱정하고 애타게 보고 싶은 마음. 꽉 끌어안고 안기고 싶은 마음. 그런 때도 분명히 있었다. 마음의 불씨는 전부 사그라져 버렸다. 완전한 전소. 남은 거라고는 그을린 시커먼 자국과 탄내 가득한 폐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끝내 '로맨스'로 읽히는 이유는,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 때문이다. 작가는 말한다. 관계는 깨진 것이 아니라 그저 복잡하게 헝클어진 것뿐이라고.


한 번 깨진 관계는 다시 붙일 수 없다고 하는 건 비유일 뿐이야. 이렇게 생각해 봐. 우리는 깨진 게 아니라 조금 복잡하게 헝클어진 거야. 헝클어진 건 다시 풀 수 있어.

소설은 긴 세월을 휘몰아치는 빠른 호흡으로 전개된다. 이야기의 급류에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새 인연의 막바지에 도달하게 된다. "때로는 금세 시간이 흘러 버렸다는 것에, 때로는 영원 같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에 놀랐다"는 문장처럼, 책을 덮고 나면 도담과 해솔과 함께 긴 시간을 살아낸 듯한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드라마도 영화도 자극적인 서사만 가득하고 진정한 로맨스가 부재한 시대다. <급류>는 그 갈증을 해소해 주는 것을 넘어, 잊고 있던 사랑의 본질을 되묻게 한다. 사랑은 위험하고, 때로는 나를 바닥까지 끌어내리기도 하지만, 결국 나를 구원하는 것 또한 누군가의 손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책을 읽고 나니 역설적으로 더 뜨겁게 사랑하고 싶어졌다. 비록 그것이 나를 휩쓸어버릴 급류일지라도, 기꺼이 뛰어들어 함께 헤엄치고 싶게 만드는 소설, <급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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