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한라산 백록담 등반기
"겨울 한라산 갈래?"
나는 평소 산을 자주 타는 편이 아니다. 계절이 바뀔 즈음, 생각나면 한 번 갈까 말까. 그런 나를 한겨울 한라산으로 이끈 건 언니네 부부의 강력한 추진력이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겨울 한라산, 백록담 등반’이라는 큰 이벤트가 내 일정표에 찍혔다.
20대 때 한 번 올랐던 한라산은 솔직히 기억 속에서 그렇게 힘든 산이 아니었다.(하지만 이 기억이 왜곡되었다는 것을 하산 후에 알았다. 나는 그 당시에 정상에 오르지는 않았고 산 중턱에서 깔짝대다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준비는 지금 생각해 보면 꽤나 안일했다. 겨울 한라산의 필수 장비인 아이젠과 스틱. 네 명이 가는데 스틱은 세 개 세트뿐이었다. 그때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새벽 6시, 어둠을 뚫고 시작된 여정
왕복 10시간을 예상한 일정이라 새벽 4시쯤 눈을 떴다. 아직 세상은 깊은 밤이었고, 몸은 잠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5시에 문을 여는 근처 김밥집에서 김밥을 사서 성판악으로 향했다. 6시를 조금 넘긴 시각, 예상했던 문자가 도착했다. “성판악 주차장 만차. 제주국제대 환승주차장 이용 바랍니다.” 결국 성판악 주차를 원한다면 새벽 5시대에는 도착해야 한다는 교훈을 몸으로 배웠다.
겨울 한라산의 아침은 유난히 더디게 밝아온다. 오전 7시 반은 되어야 해가 떠오르기에, 등산 초반부터 한참을 깜깜한 어둠 속을 헤쳐 나가야 했다.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걷는 길, 며칠 전 내린 폭설 탓에 곳곳에 하얀 눈이 두툼하게 쌓여 있었다. 입구부터 아이젠을 착용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의 공기는 차갑고 묵직했다. 서울의 살을 에는 바람만큼은 아니지만,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냉기가 분명히 있었다. 나는 티셔츠 위에 플리스, 그 위에 패딩까지 껴입고 출발했다. 반면 추위를 덜 타는 사람들은 플리스까지만, 혹은 조금 두꺼운 재킷 하나로도 충분해 보였다.
겨울 한라산임에도 불구하고 입장 예약 800명은 일찌감치 마감됐다. 산길에서는 자연스럽게 줄을 지어 걷는 순간이 많았다. 성판악 코스의 가장 큰 장점은 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이 계단이고, 급격한 오르막이나 내리막 없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내 보폭에 맞춰 천천히, 조금씩 올라가면 되니 심리적인 부담이 크지 않았다.
중간중간 속밭대피소와 진달래밭대피소가 약 1시간 반 간격으로 자리하고 있다. 각각 화장실도 잘 갖춰져 있어 쉬엄쉬엄 오르기에 더없이 좋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타이틀에 비해 난이도는 확실히 낮은 편이다.
완만한 오르막, 천천히 쌓이는 피로
흔히 속밭대피소부터 진달래밭대피소까지가 경사 구간이라고들 하는데, 체감상으로는 진달래밭 이후 백록담까지가 훨씬 더 힘들게 느껴졌다. 아마도 산행 막바지라 체력이 떨어져서였을 것이다. 눈이 없는 계절이라면 훨씬 수월하겠지만, 눈이 쌓인 겨울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계단이 눈에 파묻혀 어디가 단이고 어디가 평지인지 구분이 안 되는 구간도 많다. 아이젠이나 스틱이 없으면 그대로 미끄러지기 십상이고, 무릎에는 자연스럽게 더 많은 힘이 들어간다.
속밭대피소 즈음에 이르러서야 해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산이 서서히 색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햇살이 스며들자 공기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고, 몸도 조금씩 풀렸다. 진달래밭으로 가는 길에서 패딩을 벗어 가방에 넣었다.
층층이 변하는 옷차림, 한라산의 사계절
진달래밭대피소를 지나 백록담으로 향할 즈음에는 플리스마저 벗고 티셔츠 차림이 되었다. 걷다 보면 덥고, 잠깐 멈춰 서면 바람이 스며들어 다시 옷을 꺼내 입게 된다. 반팔부터 패딩까지,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겪는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구나 싶었다.
진달래밭대피소까지는 울창한 숲길이 이어진다. 나무들 사이를 걷는 동안은 하늘도, 풍경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면서 시야가 확 트인다. 뒤를 돌아보면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제주라는 섬의 윤곽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숨이 차던 것도 잠시 잊게 된다. 눈에 담아도 담아도 아까운 풍경이 계속해서 펼쳐진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은 마치 ‘무한의 계단’ 같다. 하나 오르면 또 하나가 나타난다. 그럴 때마다 계단 깨기라는 소소한 목표를 세운다. 저기까지만, 그다음까지만. 그렇게 조금씩 올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백록담에 도착해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백록담, 신이 허락한 풍경
정상에 섰을 때, 보기 힘들다던 백록담은 거짓말처럼 선명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덕분에 분화구의 바닥까지 또렷하게 내려다보였다. 사진으로 보던 풍경이 아니라,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상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표지석 앞에는 사진을 찍기 위한 긴 줄이 늘어서 있었고, 곳곳에서는 점심을 해결하는 일행들이 보였다. 그날 정상의 식사는 거의 핫앤쿡이 점령한 듯했다. 여기저기서 물을 붓는 소리와 김이 오르는 풍경이 묘하게도 활기찼다.
안도감이 주는 지루함, 관음사의 장관
식사를 마치고 관음사 코스로 하산을 시작했다. 성판악에서 백록담까지는 9.6km, 백록담에서 관음사까지는 8.7km. 수치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내려오는 길이 훨씬 길게 느껴졌다. 체력이 빠져서이기도 하고, 정상에 올랐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려서인지 지루함이 밀려왔다. 1km를 내려왔을 뿐인데 와치를 수십 번은 본 것 같았다.
관음사 코스 초입에서 병풍처럼 펼쳐진 백록담의 모습을 다시 한번 마주한다. 그 장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관음사로 내려온다고 하던 말이 이해됐다. 내려오는 길의 보너스 같은 풍경이었다.
관음사 하산길은 눈이 깊게 쌓여 있었다. 계단이 거의 보이지 않아 본의 아니게 스키를 타듯 미끄러져 내려오는 구간도 많았다. 산 아래쪽에 가까워져 아이젠을 풀었을 때가 오히려 더 위험했다. 얇게 쌓인 눈 때문에 방심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엉덩방아를 찧고 있었다.
관음사 코스 역시 대피소마다 화장실이 잘 마련되어 있어 크게 걱정할 일은 없다. 관리도 비교적 잘 되어 있는 편이지만, 손 씻는 곳은 없으니 물티슈를 챙기면 좋겠다는 소소한 팁도 남겨본다.
어느 정도 내려오니 이제는 내가 걷는다는 느낌보다, 발이 알아서 산을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10시간의 산행은 확실히 길다. 몸은 녹초였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가벼웠다. 몸도 마음도 자연스럽게 움츠러들기 쉬운 겨울에, 이렇게 크게 몸을 써봤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하산 후 사우나에 몸을 담그는 순간, 이게 바로 천국이구나 싶었다.
한라산의 기운을 받아, 이렇게 2026년을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