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2 일본 나가노 시가고원 스키 여행기
새벽 이동의 끝에서, 우리는 오전 6시 45분쯤 거의 정확하게 야마노에끼역에 도착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호텔로 가는 버스 첫차가 7시 45분이라 정확히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출발 전에 이 사실을 알고는 ‘이걸 어떻게 기다리지’ 싶어 호텔에 유료 픽업도 문의해 보고 결국 택시회사 링크를 받았는데 그 택시회사도 여기는 운행을 안 한다며, 다른 링크를 알려주고, 알려준 링크는 연락이 안 되고. 결국 공무원 민원 돌리듯 돌리고 돌려서 포기하고 버스 대합실에서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여행에는 원래 이런 변수도 포함되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야마노에끼역은 생각보다 꽤 괜찮은 곳이었다. 깔끔한 건물 안에 기념품가게, 포토존, 스키보드 렌탈샵 등이 있었다. 물론, 새벽이다 보니 열지는 않았지만. 실내에 대기할 수 있는 의자도 있고 화장실에는 유료이지만 샤워 시설까지 갖춰져 있었다. 장거리 여행자들을 위한 작은 배려가 느껴졌다. 우리는 시간적 여유가 있다 보니 옷도 갈아입고 버스 티켓도 미리 사두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7시 45분 버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7시 40분 무렵… 버스가 왔다. 그리고 버스가 떠났다. 그게 우리가 타야 할 버스였다는 것을 버스의 뒤꽁무니를 보고서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너무 믿었었나 보다.
우리가 짐을 옮기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버스는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떠나버린 것이다.
“어… 방금 그 버스 아니었어?”
“이미 갔는데?”
흠.
다음 버스는 8시 25분에 있었다. 게다가 무료 버스였다.
결국 나는 돈 주고 산 버스 티켓만 날리게 됐다. 큰돈도 아니고 의도치 않은 실수지만 이런 실수는 항상 마음에 남는다.
30분 정도 버스를 탄 후, 내려서 호텔로 걸었다. 1인당 부츠백을 매고 스키를 어깨에 메고 돌돌이를 끌고서.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스키장 호텔 가격은 거의 스키장 리프트와의 거리 순서로 정해진다는 사실을. 우리 호텔도 멀다고는 할 수 없지만 코앞이라고 할 수도 없었으니까. 호텔 지하에 짐을 내려놓고 우리는 곧바로 스키장으로 향했다. 심야버스로 도착하자마자 스키라니, 누가 보면 전지훈련 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시가고원에는 18개의 스키장이 있다. 그리고 통합 리프트권을 구입하면 18개의 스키장을 다 다닐 수 있다. 18개라고 하면 규모에 입이 턱 벌어지지만, 리프트 한 개인 스키장도 있으니 생각만큼 어마어마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18개의 슬로프를 다 즐기려면 그래도 3박 4일은 최소 걸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규모랄까. 다만 스키장끼리 완벽하게 이어진 구조는 아니라서 스키장과 스키장을 이동할 때는 노동이 종종 필요했다. 스키를 타러 왔는데 중간중간 크로스컨트리를 하는 느낌이었다. 점점 더 극기훈련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일본 스키장의 묘미는 비정설 구간에 있다. 설질이 우리나라 스키장보다 좋으니 정설 된 슬로프도 좋지만 자연 그대로의 눈밭을 타고 내려오는 재미가 확실히 있는 것 같다. 나야 정설도 헤매니 들어가 볼 엄두를 내지 않지만 아이들은 나랑 같이 내려오면서도 비정설사면을 즐겼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는 재미랄까.
여행 가기 전에는 아이들과 속도가 맞을지 걱정이었는 데 막상 같이 타기 시작하니 아이들이 ‘관광 스키 모드’로 변했다. 속도 경쟁 대신 주변 풍경을 보며 천천히 타기 시작했다. 덕분에 가족 전체의 페이스가 맞았고 쫓아가느라 헥헥대지는 않아도 되었다.
점심은 스키장 근처 우동집에서 먹었다. 나름 유명한 집이라더니 이유가 있었다. 국물도 국물이지만 무엇보다 채소가 푸짐하게 들어 있었다. 심지어 죽순까지 들어가 있었다. 우동면보다 채소가 더 많이 들어간 든든한 우동. 추운 날씨 속에서 먹는 따뜻한 우동은 생각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모든 게 순조로우면 여행이 아니지… 오후에 역시 스펙터클 한 방이 왔다.
리프트를 타러 가는데 부츠가 고정이 되어있지 않았는지 스키에서 이탈되며 엉덩방아를 제대로 찧었다. 마치 만화 속 장면처럼. 문제는 그 장면을 남편이 정확히 목격했다는 것이다. 아프다기보다 숨길 수 없는 쪽팔림.
오후가 되자 큰 아이가 발이 쓸려 아프다고 했다. 그래서 산정상에 있는 크럼펫 카페에 들러 부츠를 벗고 확인해 보기로 했다. 겉으로 봤을 때는 특별한 상처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다시 신어보라고 했는데 아이가 말했다.
“부츠가 안 들어가.”
스키를 꽤 탄 아이가 부츠가 안 들어간다고 하니 솔직히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여행 첫날부터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그냥 참고 있었다. 남편이 양말을 벗어주며 도와줬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하필 카페 마감 시간이 되어 우리는 밖으로 나가야 했다.
결국 아이는 급한 마음에 한쪽 발이 맨발인 상태로 내려오게 되었고, 남편이 아이를 부축한 채 이동하는 꼴이었다. 꽤나 난감하면서도 웃긴 상황이었다. 결국 아이는 자기 부츠를 포기하고 아빠와 부츠를 바꿔 신고 내려오기로 했다. 원래 무엇이든 엔딩이 좋아야 하는데 오늘의 엔딩은 워째. 쩝.
우여곡절 끝에 호텔 체크인을 했다. 우리가 묵는 방은 호텔 이치보카쿠에서 단 5개뿐인 특별 객실이었다. 싱글베드 두 개 있는 일반 호텔과 다를 바 없는 방이지만, 이치보카쿠에는 대부분 일본식 다다미 방으로 되어 있다 보니 이렇게 침대가 있는 방이 스페셜이었다. 특별 객실에 머무는 손님들은 프라이빗 배스 시간을 선택할 수 있었다.
저녁을 먹기 전 남편과 아이들은 프라이빗 배스를 하러 가고 나는 공중목욕탕으로 갔다. 공중목욕탕은 지하에 있었는데 가는 길이 마치 미로 같았다. 어두운 동굴 속을 혼자 걸어가는 느낌이랄까. 탕은 하나뿐이었지만 유황 온천이라 그런지 물이 꽤 부드럽게 느껴졌다.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었다. 오늘의 엔딩은 스키장이 아니라 대욕장으로 해야겠다.
저녁은 뷔페였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먹을 건 적당히 있는 편이었다. 저녁을 먹으니 배가 부르고 기분이 좋으면 항상 탈이 난다. 신랑이 갑자기 아까 스키장에서 있었던 부츠 이탈 사건을 다시 꺼내며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한 번이면 웃고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계속 반복되니 슬슬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먼저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괘씸해서 한동안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문을 열어줄 수가 없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잠에 빠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