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3 일본 나가노 시가고원 스키 여행기
아침 6시 30분. 눈을 뜨자마자 이상하리만치 몸이 가벼웠다. 무려 12시간을 잤다. 밤 버스의 뒤척임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드디어 컨디션이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스키여행은 늘 그렇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고, 해가 지기도 전에 졸려진다. 몸은 피곤한데 마음은 맑다. 눈밭 위에서 하루를 보낼 준비를 하는 사람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단정해진다.
7시 15분,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조식은 뷔페. 일본식 반찬 옆에 스크램블에그와 소시지가 나란히 놓여 있다. 맛은 “와!” 할 정도는 아니지만, 든든하게 먹어둔다. 스키장에선 뭐든 잘 먹어야 한다. 안 그러면 리프트 위에서 배고픔과 싸우게 된다.
8시 15분, 스키복을 차려입고 버스를 타고 이치노세 패밀리 스키장으로 이동했다. 전날 처음 내렸던 야마노에끼 쪽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세 개가 나란히 붙어 움직이는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는데, 아래로 자이언트 슬로프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름값을 한다. 경사는 제법 있지만 폭이 넓어 마음이 놓인다. 마치 “넘어져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설원 같다.
이날의 메인은 테라코야 스키장. 정상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꼭 마시고 싶었지만, 우리 가족은 그런 감성에는 별 관심이 없다. “빨리 내려가자.” 이 현실적인 반응들. 결국 커피는 마음속에서만 마셨다.
대신 하늘이 보상해 주었다. 쨍하게 맑은 날씨 덕분에 북알프스가 어제보다 훨씬 또렷하게 보였다. 장엄하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산이 단순히 ‘보이는’ 게 아니라,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왜 ‘북알프스’라고 부르는지 그제야 이해했다. 보고 있는데도 자꾸 더 보고 싶다. 마치 그랜드캐니언을 마주했을 때처럼,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 말수가 줄어드는 기분. 스키를 타러 왔지만, 한동안은 그냥 서서 바라보고 싶었다.
히가시 다테야마와 니시 다테야마를 오가며 몇 번을 오르내렸을까. 어제 무릎 아프다며 징징거렸던 큰아들이 또 무릎이 아프다며 쉬자고 한다. 아이의 투정과 진짜 통증 사이에서 부모는 늘 애매하다. 결국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따뜻한 실내 공기와 물 한 모금에 아이 표정이 조금 풀린다. 다시 나가 리프트를 세 번쯤 타니 벌써 점심시간. 슬로프가 엄청 길지는 않은데, 시간은 눈 녹듯 사라진다.
점심은 나름 유명하다는 라면집으로 향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자판기에서 식권을 뽑고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마치 의자 하나를 두고 눈치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주문 후 번호를 일본어로 불러주니 혹시라도 놓칠까 봐 귀를 쫑긋 세우고 대기했다. 긴장 속에서 받아 든 라면 한 그릇. 전날 먹었던 라면집만큼의 감동은 아니었지만, 추운 날씨 속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국물은 언제나 옳다. 면을 후루룩 삼키며 ‘아, 이 맛에 스키 타지’ 하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오후가 되자 기온이 올라 눈이 슬러시로 변했다. 그렇게 좋다던 일본의 설질도 이른 봄볕 앞에선 어쩔 수 없다. 발밑이 무겁게 느껴졌지만, 테라코야 하단부의 숲길 슬로프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눈 상태는 썩 좋지 않았지만, 빽빽한 나무들 사이를 가르는 느낌이 꽤 근사했다. 마치 설원 속 비밀 통로를 지나는 기분. 마지막은 다시 자이언트 슬로프에서 시원하게 마무리했다.
전날 구매했지만 사용하지 못한 버스 티켓이 떠올라 환불이 되는지 물어봤다. 결과는 예상대로 “안 됩니다.” 여행에서는 미련을 빨리 버리는 게 이롭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프라이빗 바스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이 발끝부터 어깨까지 천천히 올라오며 하루의 피로를 녹였다. 물속에 잠기면 이상하게 마음도 고요해진다. 오늘의 웃음과 투정, 아쉬움이 잔잔히 가라앉는다.
저녁은 또 뷔페. 그런데 토요일이라 그런지 참치가 나왔다. 접시에 참치를 몇 번이나 담았는지 모른다. 이틀째 비슷한 메뉴를 먹다 보니 ‘사흘은 못 먹겠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 순간만큼은 만족스러웠다. 여행지에서의 식사는 늘 과하다 싶을 만큼 먹게 된다.
방으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여행 전부터 약속한 ‘저녁 공부’를 꺼냈다. 긴 연휴라고 마냥 놀 수는 없다는 나름의 원칙. 하지만 현실은 한 명은 징징, 한 명은 모른 척. 나 역시 마음이 흔들렸다. “이게 뭐라고 여행 와서까지…” 싶다가도, 곧 3월이라는 현실이 머리를 스친다. 결국 맥주 한 캔을 따고, 가져온 책 <30일의 밤>을 펼쳤다. 활자를 따라가다 보니 아이들 소리도 점점 멀어졌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었다.
다음 날은 호텔 이동 날. 이치보카쿠에서 산라쿠로 옮겨야 했다. 나는 스키를 하루 쉬기로 했다. 무릎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는 큰아들과 함께. 솔직히 말하면, 몸도 마음도 잠시 숨 고르기가 필요했다. 큰아들은 스키를 타러 온 건지 핸드폰을 하러 온 건지 모를 모습이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사춘기는 설원에서도 진행 중이다.
조식을 먹고 남편과 둘째를 배웅했다. 이날은 키즈데이여서 초등학생 이하 아이들은 리프트 무료. 매표소에 갔더니 따로 티켓 없이 무료입장 통로로 가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스키장마다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는 걸 또 배웠다.
나는 방에 남아 짐을 쌌다. 이상하게 짐은 줄지 않고 늘어난다. 산 것도 없는데 왜 이리 부피가 커졌는지. 체크아웃을 하며 유황온천 입욕세 1인 300엔을 냈다. 하루에 150엔이다. 체크 아웃 후, 작은 마을 구마노유를 혼자 한 바퀴 돌았다. 스키를 들고 다닐 땐 보이지 않던 풍경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내 키보다 높게 쌓인 눈벽, 50센티는 족히 넘어 보이는 고드름. 따뜻해진 날씨에 고드름이 툭, 툭 떨어진다. 저거 잘못 맞으면 큰일 나겠네, 하며 괜히 머리를 한 번 만져본다.
점심은 시가 리버사이드호텔의 화덕피자. 산골짜기에서 만난 피자는 생각보다 더 근사했다. 치즈 살라미, 토마토 모짜렐라 세 판과 라면 하나를 주문하자 가족들이 “왜 이렇게 많이 시켰어?” 하고 핀잔을 줬다. 순간 기세에 눌렸지만, 막상 피자가 나오자 모두 말이 없어졌다. 딱 맞는 양이었다. 피자엔 역시 맥주. 시가고원 전통 에일맥주를 한 모금 마시니, ‘아, 이게 여행이지’ 싶었다.
산라쿠에 도착해 방을 정리했다. 여기서 5일을 머문다 생각하니 괜히 단정히 정돈하고 싶었다. 스키 장비, 여분의 옷, 책을 제자리에 두고 나니 마음도 정리되는 느낌. 남은 시간 동안 책을 읽으며 조용히 쉬었다. 여행 중 하루쯤은 이렇게 쉼표를 찍어도 괜찮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저녁은 일본식 정찬. 생선과 국, 밥, 정갈한 반찬들, 디저트와 사과까지. 방은 조금 낡았지만, 식사는 정성스러웠다. 매 끼니가 이렇게 차려진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방으로 돌아오자 또 다른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비 고등학생이 예비 중학생보다 문제집을 덜 가져왔다는 사실에 남편이 대노했다. 설원 위에서는 웃고 떠들던 우리가, 방 안에서는 다시 현실의 부모가 된다. 여행을 와도 가족은 가족이다. 완벽하게 편안하진 않지만, 그래서 더 진짜 같다.
눈 위를 달리고, 슬러시를 밟고, 피자를 나눠 먹고, 공부 때문에 티격태격하며 우리는 또 하루를 보냈다. 시가고원의 하얀 설원 위에서, 우리 가족은 조금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