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1 일본 나가노 시가고원 스키 여행기
일본 나가노 스키여행 첫날
알람이 울리기 전, 눈꺼풀이 먼저 들린 건 의지라기보다 무언의 압박에 의한 자동반사였다. 새벽 4시.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방 안에서 나는 내가 오늘 치러내야 할 숫자를 가늠해 보았다. 7시 반 출근, 11시 반 퇴근, 12시 반 귀가. 그리고 1시 20분 공항 행. 인생은 가끔 나를 몰아세우는 데 선수가 되곤 하는데, 그날은 유독 코너로 몰린 기분이었다. 이 모든 전력질주의 끝에 일본 스키 여행이 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1년 전, 고등학생이 되는 첫째 아들을 위해 성인이 되기 전 마지막 가족 여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달력에 동그라미를 칠 때만 해도 그것은 솜사탕처럼 가볍고 달콤한 미래였다. 그러나 막상 여행 며칠 전 짐을 싸기 시작하자 설렘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4인 가족, 각자의 몫으로 할당된 스키와 부츠백, 캐리어. 총 열두 개의 짐더미가 거실을 가득 채웠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 나는 지금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구나. 아니, 강을 건너기 위해 집 한 채를 통째로 짊어졌구나.
공항 근처에 산다는 것은 때로 특권이 아니라 장애가 된다. 우리가 호출한 대형 밴들은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로 번번이 우리를 외면했다. 결국 '거부권이 없는' 타다를 불러 세웠다. 도착한 기사님의 표정에서 '이것은 운송인가 이사인가' 하는 철학적 고뇌를 읽었다. 그래도 막상 실어보니 스타리아에 스키 네 세트와 트렁크 네 개를 무난히 실을 수 있었다. 각자의 무릎 위에 부츠백을 고이 모시고, 서로의 숨소리가 닿을 만큼의 밀도로 테트리스 조각이 되면 가능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 덩어리의 '화물'이 되어 공항으로 향했다.
체크인 카운터는 또 다른 전쟁터였다. 기내에 반입하려던 부츠백이 규격 초과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잠시 정신의 끈을 놓을 뻔했다. 상대적으로 작은 기내용 트렁크를 휴대하고 부츠백을 붙이기로 하고 액체류와 보조 배터리를 바꿔가며 쇼를 했다. 30분이 순식간에 휘발됐다. 하지만, 이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까먹고 붙여버린 보조 배터리 덕분에 짐검사 전화를 받고 다시 한번 뛰어가야 했다.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스키를 몇 시간 탄 듯 진땀이 났다.
김포공항 라운지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시장통 같았다. 나는 비좁은 틈에 끼어 앉아 와인을 홀짝였다. 아시아나 단거리 노선에서 주류 서비스가 사라졌다는 비보를 접한 뒤였기에, 그것은 생존을 위한 사전 충전이었다. 사전 기내식으로 해산물식을 선택했는데 구운 연어가 나왔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기피하는 메뉴였지만, 창 밖 풍경이 모든 것을 상쇄했다. 붉게 타오르는 지평선 위로 머리에 흰 눈을 이고 선 봉우리 하나. 아무도 내게 그것이 무엇인지 일러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이 후지산임을 직감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 장면 하나를 보기 위해 나는 오늘 그토록 달렸어야 했으니까. 일본은 몇 번 가봤지만 기내에서 후지산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황홀했다.
하네다에 도착해서는 남편의 특명을 수행하기 위해 지하철로 두 정거장 거리의 마트를 찾았다. 낯선 도쿄의 골목을 걷다 보니 비로소 내가 다른 나라 땅에 발을 붙이고 있음이 실감 났다. 아이와 함께 낑낑대며 술 보따리를 들고 오다 지하철을 잘못 타 터미널을 지나쳤을 때, 나는 헛웃음이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공항 내 로손 편의점에서도 맥주 가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발품과 돈을 맞바꾸려던 나의 가련한 노력은 그렇게 소소한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밤 10시 20분. 시가고원으로 향하는 야간버스에 몸을 실었다. "시가고겐"이라는 내 발음을 찰떡같이 "시가코겐"으로 교정해 주는 직원을 뒤로하고, 나는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밤 11시, 오다이바의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다시 짐을 옮겨 싣는 고행을 거쳤다. 불이 꺼지지 않는 버스 안, 불편한 의자에 몸을 의지한 채 나는 생각했다.
'이 나이에 이렇게 야간버스에서 밤을 지새우게 될 줄이야.'
하지만 그 피로감 속에서도 묘한 해방감이 일었다. 어둠을 뚫고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조금씩 일상의 때를 벗겨내고 있었다. 시가고원은 아직 멀었지만, 우리는 이미 그곳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진짜 여행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내 마음속엔 벌써 묵직한 이야기가 한 보따리 쌓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