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더니,
내가 아닌 내 삶이 펼쳐져 있었다

블레이크 크라우치 <30일의 밤> 리뷰

by moonconmong

당신은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 삶은 지금과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그 길 대신 다른 길을 걸었더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상상의 문을 두드려 본 적 있을 것이다. 블레이크 크라우치의 <30일의 밤>은 바로 그 문을 열어버린 소설이다. 그것도 아주 거칠고 숨 막히게.


행복하지만, 가끔은 그리운 삶


주인공 제이슨 데슨은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수다. 아내 다니엘라는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아내이고, 아들 찰리는 어엿한 소년이 되어 가고 있다. 어딘가 평범하고, 그래서 충분히 행복한 삶.


그러나 제이슨의 마음 한편에는 가끔 서늘한 바람이 스친다. 결혼 전 그는 주목받던 과학자였다. 지금의 행복을 선택하면서 내려놓은 것들이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다. 화가의 꿈을 접고 가정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다니엘라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각자의 마음속 어딘가에 '다른 삶'의 잔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소설은 그 잔상을 비틀어,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또 다른 현실로 만들어버린다.


상자 안에서 눈을 뜨다


어느 밤, 제이슨은 오랜 친구 라이언의 수상 파티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괴한에게 납치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거대한 상자 안에 있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서는 순간,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이 세계에서 제이슨은 유명한 천재 과학자다. 벌라서티 연구소를 이끄는 리더이자, 그 상자를 직접 발명한 사람. 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다니엘라와는 15년 전 이미 헤어진 사이였고, 지금 그녀는 라이언과 새로운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익숙한 이름들, 익숙한 얼굴들. 그러나 모든 관계가 비틀려 있는 세계.


제이슨은 다니엘라를 찾아간다. 마침 전시회를 열고 있던 그녀는 반갑게 그를 맞아주고, 사정을 들어 자기 집에 머물게 해 준다. 이 세계에서 다니엘라는 화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다. 꿈을 포기하지 않은 다니엘라. 그 모습은 제이슨에게 낯설고도 처연하게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 괴한이 들이닥친다. 그리고 다니엘라는 제이슨의 눈앞에서 세상을 떠난다.


이 장면에서 소설은 비로소 본격적인 속도를 얻기 시작한다.


다중우주라는 무한한 미로 속으로


<30일의 밤>의 핵심은 다중우주다. 양자역학에서 출발한 이 개념은, 우리가 내리는 모든 선택의 순간마다 세계가 갈라진다고 말한다. 어떤 세계에서 나는 그 사람과 결혼했고, 또 다른 세계에서 나는 그 사람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무한히 갈라진 가능성들이 저마다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


제이슨이 납치된 상자는 그 사이를 넘나드는 장치다. 문제는, 상자 안에서 어느 세계로 연결될지는 탑승자의 '의식 상태'에 달려 있다는 것. 명확한 의도와 집중이 없으면, 수없이 갈라진 현실 중 어디로 떨어질지 알 수 없다.


제이슨은 벌라서티 연구소에서 만난 어맨다와 함께 상자 안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그때부터 소설은 숨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세계와 세계 사이를 표류하는 두 사람의 여정은 긴박하고, 아찔하고, 때로는 처연하다. 어떤 세계에서는 문명이 붕괴되어 있고, 어떤 세계에서는 전혀 낯선 자신의 얼굴을 마주친다. 수십 번의 시도 끝에 제이슨은 자신의 세계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그다음부터였다.


환장하는 결말을 향해


자신의 세계로 귀환한 제이슨을 기다리는 것은 안도가 아니었다. 소설의 후반부는 표현이 거칠어질 만큼 예측 불가능하고 스펙터클 하게 전개된다. 마치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실제로 블레이크 크라우치는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데, 그의 직업적 감각이 소설 곳곳에서 살아 숨 쉰다.


장면마다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챕터를 넘길 때마다 화면이 전환되는 듯한 리듬감. 등장인물들의 숨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생생한 묘사. 페이지를 덮기가 어렵다. 어쩌면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그 몰입감일지도 모른다.


여행 중에 읽은 책이었는데, 평소라면 밖에 나가 돌아다닐 시간에 방 안에 남아 미등을 켜고 책을 붙잡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의 힘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당신은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이 삶을 선택하겠습니까?


다중우주, 양자역학, 과학적 장치들. 하지만 <30일의 밤>의 중심에는 결국 하나의 질문이 있다.


나는 지금 내 삶을 사랑하는가.


제이슨은 수없이 많은 세계를 떠돌면서도 단 하나의 방향을 향해 달려간다. 다니엘라와 찰리가 있는 그 세계, 유명한 과학자는 되지 못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그 평범한 삶으로. 그는 그것을 선택했고, 다시 선택한다. 수십 번, 수백 번.


양자역학의 문외한으로서 이 소설이 그 개념을 얼마나 정확하게 활용했는지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소설적 언어로, 인간적인 감각으로 충분히 그럴싸하고 충분히 스릴 있게 빚어냈다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모든 장치의 끝에서 소설이 건네는 메시지는 의외로 소박하고 따뜻하다.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을, 지금 당신이 살아가는 이 삶을, 그냥 한 번 꼭 쥐어보라고.

그러면 충분하다고.


초반의 다소 루즈한 발단부를 넘기고 나면, 이 소설은 당신의 시간을 흔쾌히 삼켜버릴 것이다. 다중우주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두말할 것 없고, 평소 장르소설을 즐기지 않는 독자라도 전개부터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만큼 빠져들게 된다.


밤에 읽기 좋은 책이다. 미등 하나만 켜두고, 혼자서, 조용히.


































Sonnet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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