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5 일본 나가노 시가고원 스키 여행기
다음 날, 본격적으로 언니네의 보드 도전기가 시작됐다. 아침부터 분주했다. 리프트권 구매해서 나눠주고, 장비 빌리고, 형부는 가져온 보드가 발에 안 맞아 조정하고. 스키장 아침은 전쟁터와 다를 바 없다. 특히 인원이 늘어나면 더 그렇다.
언니는 우리 호텔 바로 맞은편에 있는 재팬시가에서 보드를 빌렸다. 호텔 사장님이 추천해 주신! 3일 7,500엔. 호텔 사장님 소개 찬스를 써서 더 할인받아 저 가격으로 대여할 수 있었다. 다른 렌탈샵들은 10,000엔이 훌쩍 넘어가는데 시작부터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보드 상태가 아주 훌륭하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엣지는 무뎌 보였고, 바인딩은 헐거운 느낌이랄까. 그래도 우리는 애써 말했다. “가격이 좋잖아!” 여행에서는 이런 자기 최면이 필요하다.
기분 좋게 빌려서 첫 보딩을 시작했다. 기분 좋게 첫 보딩을 시작했으면… 우리 여행이 아니지. 생각보다 오래 쉰 언니네 부부답게 질질질질-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산길을 따라 내려오는 좁은 길 코스에 접어들었는데… 한국 스키장과 달리 펜스가 없다 보니 언니가 겁을 집어 먹었다. 좁은 길은 초보 보더에게 쥐약이었다. 한쪽은 낭떠러지처럼 보이고, 뒤에서는 누군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 같은 압박감. 언니는 그 길에서 몇 번을 멈췄다. 형부는 휴대폰도 떨궜는데 다행히 뒤에 오던 보더분이 찾아 주셨다. 이런 눈밭에서. 그것도 대단하지.
스키장 하단에서 그들을 기다리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게 가족 여행이지.’ 어설프고 버벅거리는 우리의 스키 여행.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또 넘어지는 반복. 그게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장비는 조금 허술했지만, 의지만큼은 그 어떤 프로 선수 못지않았다.
그래도 살아서 내려온 우리는 광활한 평야처럼 넓은 코스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랬더니 이제 좀 속도가 나왔다. 긴장이 느슨해지면, 사건이 하나씩 생기는 법. 갑자기 형부의 고글이 끊어졌다. 오래된 고글이다 보니 삭아서 끊어진 것이다. 작렬하는 태양빛도 그렇지만 눈반사까지 더해서 눈을 뜨기 조차 힘든데 워쩐다냐. 결국 형부는 고글 없이도 타는 신공을 보여주었지만, 얼마 후 형부는 결국 먼저 들어가겠되었다. “힘들어.” 솔직한 한마디였다. 괜히 자존심 세우지 않는 게 오히려 현명하다.
우리는 계속 타기로 했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여행은 각자의 속도로 가는 거라고. 모두가 같은 템포로 움직이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날 우리는 많이 넘어졌고, 많이 웃었다. 실력은 조금씩 늘었고, 두려움은 조금씩 줄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기 전, 우리는 생각했다. “그래도 오늘 꽤 탔네.”
여행에서 가장 무서운 건 날씨도, 돈도 아니다. “다쳤다”는 한마디다.
4시가 조금 넘어 슬슬 마무리하려던 참이었다. 휴대폰에 톡이 하나 왔다. “다쳤어.” 아이가 보낸 메시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스키장에서 이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전화를 걸었는데, 받기까지 몇 초가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아이랑 같이 타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타고 들어가겠다고, 아이 먼저 보냈는데 고새 일이 터진 것이다.
다행히 엄지손가락을 삔 정도 같다고 했다. 큰 사고는 아니었다. 냉찜질하고 버텨보기로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비로소 주위가 보였던 것 같다. 아마 그날 가장 크게 긴장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여행은 늘 예상 밖의 변수와 함께 온다. 그래서 더 생생하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가면 좋겠지만, 작은 사고 하나가 여행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버릴 수 있다. 다행히 우리는 그 선을 넘지 않았다.
다음 날, 또 한 번의 사고가 있었다. 가만히 서있던 형부에게 다른 스키어가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부딪혔다. 멀리서 봤을 때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형부가 덤블링하듯 한 바퀴 굴렀으니까. 넘어진 당시에는 정신을 못 차리던 형부도 조금 시간이 지나니 타박상만 남았을 뿐 괜찮아졌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이 스쳤다. ‘이 여행 여기서 끝나는 건 아닐까?’ ‘병원 가야 하나?’ 별의별 상상이 다 떠올랐다.
형부가 조금 더 쉬고서 다시 일어섰다.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겠지만, 일행이 있다 보니 참고 타보기로 한 것이다. 그 모습이 괜히 멋있어 보였다. 여행에서 중요한 건 완벽하게 타는 게 아니라, 다시 일어나는 힘 아닐까.
그날 이후 우리는 서로를 더 자주 확인했다. “괜찮아?” “무리하지 마.”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신뢰가 있었다.
그날 밤, 낮에 있었던 우여곡절 때문인지, 술이 술술 들어갔다. 어느 정도 와인과 맥주가 오가고, 보드게임이 이어지고, 웃음소리가 방을 채운다. 그러다 누군가 말했다. 별 보러 나가보자. 그제야 사장님이 시가고원에서 별이 많이 보인다고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래서 후다닥 옷을 입고 나가보기로 했다. 호텔 주변을 걷고 있다 항상 문이 닫혀있던 편의점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발견했다. 여기 오고서 낮에도, 저녁에도 여러 번 가봤지만 불이 꺼져있었는 데 오히려 밤에 열려 있었다.
“어? 열었어?”
그 순간의 반가움이란.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꽤 있었다. 다들 우리처럼 놀란 표정이었다. 우리는 다시 숙소로 올라가 지갑을 가져왔다. 사장님은 곧 문을 닫는다고 엄포를 놔서 부랴부랴 뛰었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아이스크림이었다. 정확히는 420엔짜리 빵빠레. 한국보다 비쌌다. 순간 잠깐 고민했다. ‘이 가격이 맞나?’ 그런데 한 입 먹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진하고 부드러웠다. “맛있으면 됐지 뭐.”
눈 내리는 밤, 술기운이 살짝 도는 상태로 먹는 아이스크림. 그 조합이 그렇게 좋을 줄 몰랐다. 추워서 오래 걷지는 못했지만, 그 짧은 시간이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는다.
여행에서는 거창한 이벤트보다 이런 소소한 장면이 마음에 박힌다. 화려한 레스토랑보다 편의점 불빛이, 고급 디저트보다 420엔 아이스크림이 더 선명하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