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4 일본 나가노 시가고원 스키 여행기
스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뭘까. 숙소? 음식? 동행? 물론 다 중요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스키 여행의 성패는 단 하나, 눈 상태에서 갈린다. 그리고 우리가 오쿠시가에서 맞이한 그 아침은,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넓게 펼쳐진 슬로프 위에 부드럽게 깔린 설질은 마치 새 이불을 처음 펼쳐놓은 느낌처럼 폭신했고, 날이 박히는 감각이 짜릿짜릿했다. 경사가 있는 구간도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여긴 좀 부담인데’ 하고 주춤했을 구간도 그날은 그냥 몸을 맡기면 됐다. 눈이 다 받아줬으니까.
사람도 많지 않았다. 일본 스키장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이 여유로움 아닐까 싶다. 한국이었다면 리프트 줄에서 이미 체력의 20%는 잃었을 텐데, 이곳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슬로프는 널찍했고, 하얀 산은 고요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스키 날이 눈을 가르는 소리만 또렷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진짜 스키를 잘 타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착각은 오래가지 않는다. 몇 번을 오르내리다 보니 허벅지가 먼저 진실을 말해준다. ‘너 지금 신났지? 근데 우리 이미 한계야.’ 그렇게 우리는 잠깐 쉬었다가 다시 올라가고, 또 내려오고를 반복했다. 오쿠시가 뺑뺑이. 말은 귀엽지만 다리는 전혀 귀엽지 않았다. 그래도 그날 아침, 그 설질 위에서의 몇 번의 활주는 이번 여행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힐 만큼 완벽했다.
오전의 여운을 안고 우리는 야케비타이야마로 넘어갔다. 이름부터 묘하게 비장하지 않은가. 왠지 한 코스씩 정복해야 할 것 같은 느낌. 실제로도 그랬다. 우리는 거의 도장 깨기 하듯 코스를 하나씩 타 내려왔다. ‘여기까지 왔는데 저 코스는 타봐야지’ 하는 욕심이 발목을 잡는다. 아니, 정확히는 허벅지를 잡는다.
야케비타이야마에서 내려다본 이치노세 마을 풍경은 한 폭의 엽서 같았다. 하얀 지붕들, 낮게 깔린 구름, 그리고 그 사이를 가르는 슬로프. 스키를 타러 왔는데 어느 순간 관광 모드가 된다. 잠깐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싶지만, 또 마음 한구석에서는 ‘한 번이라도 더 타야지’라는 스키어 특유의 집착이 꿈틀댄다. 결국 우리는 풍경을 눈에 담아두고 다시 내려왔다.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체력이었다. 마감 시간은 맞추겠다는 오기 하나로 오후 4시가 넘도록 탔다. 마지막 하강에서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턴이 아니라 거의 살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조금만 버텨줘. 숙소 가면 쉬게 해 줄게.’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내려왔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의 안도감이란. 샤워기의 뜨거운 물이 온몸을 감싸는 순간, 비로소 하루가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그날 우리는 이미 충분히 불태웠다.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그날 저녁, 언니네가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저녁 6시 45분. 드디어 언니네가 도착했다. 나가노에서 먹을 것을 한가득 짊어지고 온 언니네의 모습은 마치 장거리 원정대를 보는 것 같았다. 슈퍼는커녕 편의점 하나 없는 동네를 위해 나가노부터 잔뜩 짊어지고 온 것이다. 여행의 낭만은 도착 후에야 시작되는 법이다. 그전까지는 이동이라는 이름의 체력전만 있을 뿐.
우리도 스키를 하루 종일 타고 온 상태라 이미 녹초였는데, 언니네의 얼굴은 ‘오늘 하루가 며칠 같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당연하지. 공항에서 도쿄역, 도쿄역에서 나가노역, 나가노역에서 다시 버스. 이동에 이동을 거듭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묘하게 웃음이 났다. 각자 얼마나 힘들었는지 썰을 풀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테니, 우리는 그걸 생략하기로 했다. 대신 식탁에 둘러앉아 허겁지겁 저녁을 먹었다. 배가 고프면 사람은 솔직해진다. 말수는 줄고 젓가락 속도는 빨라진다.
그렇게 첫날밤은 거창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거창한 환영식 대신 맥주 한 캔, 짧은 수다, 그리고 피곤에 절어가는 눈꺼풀. 여행은 이렇게 현실적인 순간들로 채워진다.
저녁 후, 우리는 가볍게 맥주를 마셨다. ‘가볍게’라고 썼지만 사실은 피곤해서 오래 못 마셨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술자리는 보통 길어지기 마련인데, 그날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마무리됐다. 다들 몸이 먼저 항복을 선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짧은 시간이 참 좋았다. 서울에서 볼 때와 달리 눈 덮인 일본 산속에서 만났다는 것 자체가 오묘했다. 그 자체가 이벤트였다. 언니는 보드를 타겠다고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고, 형부는 벌써부터 ‘내일은 어디를 가야 하냐’며 계획을 묻고 있었다. 피곤한데도 설레는 눈빛. 그건 아마 여행 첫날만이 줄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나는 그날 밤 거의 다 읽어가던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지 못했다. 강제 소등 같은 졸음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찮았다. 내일은 더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