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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이온 May 24. 2021

노자 도덕경 6장에 대한 단상

비트겐슈타인적 노자 읽기

谷神不死.

곡신불사

산신령은 죽지 않는다.

나는 이 부분을 노자가 당시 사람들을 혹세무민하던 산신령이나 기타 무속신앙, 혹은 사상의 오류들을 비판하려던 구절로 읽었다. 내 생각이지만 6장은 전반적으로 노자의 불사신 산신령 우상숭배나 미신 비판, 노자가 생각한 인간들이 온갖 미신들과 오류들을 추종하고 사회적 혼란까지 야기하는 원인이 그려진 부분인 것 같다.

혹세무민하는 산신령 숭배 같은 미신이 등장하는 이유는 말을 확정적으로 하고 규정하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에 따르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사람들에게 명령하거나 주입하려는 시도 때문이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노자가 생각했던 이러한 혹세무민하는 미신이 발생하는 원인은 밑에 나온다.


是謂玄牝 玄牝之門,

시위현빈, 현빈지문

“이것이라 함”을 일컬어 낳는 것이라 하는데, 낳음의 문이고,

그리고 나는 이 구절에 등장한 시위(是謂)를 ‘“이것이라 함”을 일컬음’이라고 번역했다. 다시 말해 是(시)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말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영원불멸한 것이라고 是(시)했고, 공자는 인의예지를 인간이 따라야 할 도덕적 근원으로 是(시)했다. 하지만 노자가 보기에 인간의 이러한 是(시), 즉 정의하거나 규정하거나 “이것이라 함”을 일삼는 행위는 모두 세상천지의 모든 것을 탄생시 켜내는 창구, 현빈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빈은 그야말로 우주의 모든 것을 창조하거나 규정해내는 창구이지만, 인간이 是(시) 하려는 시도는 차차 온갖 미신과 오류에까지 나아가기 쉽다.

여기서부터 노자가 지적한 온갖 미신과 오류의 근원이자 시작이 등장한다. 우선 이 현빈(玄牝)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아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 김원중 선생님의 주석에 따르면 소위 말하는 암컷의 생식기라고 한다. 아마 무언가를 낳거나 탄생시키는 근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시위천지근 면면약존, 용지불근.

“이것이라 함”이라고 일컫는 것은 천지의 근원인지라 조금씩 모든 것으로 이어져버려 그야말로 나아가지 않는 곳이 없다. (그래서 온갖 잡설과 오류들로 이어질 수도 있다.)

위에서 말했듯 是(시)는 인간이 우주 만물을 규정하고 생성해내는 근원, 현빈이다. 인간이언제쯤 언어능력을 습득했는지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어느 시점이든 인간은 언어능력을 키우고 무언가를 정의하거나 규정하는 습관을 들이게 됐을 것이다. 처음에는 당장 생존에 필요한 음식, 물, 사람, 동물을 지칭하거나 정의하는 선에서 그쳤을 테다. 하지만 이렇게 무언가를 정의하고 규정하는 습관은 점차 사방천지로 뻗어 나가 불사신 산신령 숭배를 비롯한 기상천외한 온갖 미신과 잡설, 혼란한 사상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과 같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오류들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노자는 당시 자신이 살아가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이렇게 사방천지에서 들끓은 是(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인간은 언제나 다툼을 이어왔다. 사소한 말싸움에서 부터 재산을 둘러싼 문제, 사업을 둘러싼 문제, 심지어는 정치적이고 큰 문제까지 말싸움을 했을 테다. 하지만 노자가 생각하기에 당시 춘추전국시대를 일으킨 “말싸움”은 무언가 결이 달랐다. 

당시는 인류가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전환되는 급격한 발전기였기 때문에 농업생산량과 인구가 폭증하게 되어 더 이상 기존 주나라 봉건제 시스템이 사회를 유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인간은 너도 나도 발벗고 사회적 혼란에 뛰어들어 사회에 필요한 여러가지 대안들을 제시하고 나섰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힘의 논리에 불과했을 지라도 말이다. 다시 말해, 춘추전국시대는 사람의 “말”이 가지게 된 파워가 생존을 위한 유용한 도구의 선을 넘어서 천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어마무시한 파괴도구로 성장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노자는 당시 춘추전국시대를 뒤흔든 혼란의 근원으로 是하는 행위, 즉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오류와 극악무도함을 비판하고, 이것이 불사신 산신령을 숭배하는 것과 질적으로 똑같은 짓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노자는 플라톤을 이데아라는 불사신 산신령을 섬기는 사람, 공자는 인의예지라는 불사신 산신령을 섬기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평가했으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노자의 철학적 프로젝트의 방향은 인간을 불사신 산신령 숭배로부터 해방시키는 것, 즉 인간들이 그들 스스로 시로 탄생시킨 유를 숭배하는 것으로부터 탈피시키고 진정한 사상적 자유를 발견해 나가도록 돕는게 아니었을까 살짝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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