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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이온 Mar 19. 2024

1강 - 마리우스의 군제개혁과 동맹시 전쟁

1.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군제개혁”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번주에 발제했던 시대를 살아가고 있던 로마인들에게 군제개혁이란 빈부격차 해소와 비효율적 편제 해소라는 군사적 차원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군제개혁은 사실 전투력 차원보다 빈부격차 해소라는 대단히 사회적인 차원에서 더욱 중요하게 관심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로마의 군제가 가지고 있던 사회적인 문제들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당시 로마 군제는 빈부격차를 상당히 가속화시키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당시 로마 공화국의 전쟁이 대다수 평민들의 경제적 희생과 함께 수행되었던 것임을 상기해야 한다. 로마군은 개인들이 사비를 들여 장비를 마련해야 했으며, 군복무를 하는 과정에서 방치될 수밖에 없었던 경제적 생업의 손실은 모든 로마인들이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감내해야 했던 희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 것은 모순적이게도 충분히 넓어진 로마의 영토 때문이었다.

당시 로마 공화국은 이미 오랜 전쟁을 거쳐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되었으며 소위 말하는 “수익성 있는” 만만한 지역들을 다수 정복한 상태였다. 따라서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이 일어나기 직전의 로마 공화국의 전쟁은 “정복전”이라기 보다는 “방어전”의 성격이 강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로마 시민들이 징병되어 군복무를 하면서 이웃한 부유한 국가를 정복할 때 전리품을 약탈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약탈기회”는 로마 시민들이 기나긴 전쟁수행 과정 동안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가사노동과 경제활동의 손실을 메꿔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제 전쟁의 양상이 게르만족과 여러 해적들로부터 속주 식민지와 본토를 방어하는 방어전의 성격을 띄게 되자 더 이상 평민들이 전쟁수행 과정에서 전리품을 획득하기 어려워진다. 또한 영토와 식민지가 넓어졌기 때문에 평민들의 군복무 기간이 넓은 영토를 방위하기 위해 기존의 1~2년에서 5년까지도 연장되어가는 바람에 생업으로 복귀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점차 낮아져간 탓도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군복무를 위해 허비하는 기간은 고스란히 평민들의 경제생활에 큰 타격을 줬을 것이다. 어느새 로마인들에게 군복무는 가난해지는 지름길이 되어 있었으며, 로마는 강대해질수록 나약해지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러한 빈부격차의 가속화는 로마군의 수적, 질적 측면을 모두 약화했다. 징병될 재산요건을 갖추지 못한 로마인은 군복무를 하기 어려웠고, 가까스로 군복무를 할 수 있게 됐다거나 불운하게 징병당했다 하더라도 빈민들이 마땅한 무기를 가지고 갈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또한 어떻게든 돌과 방망이 등으로 무장한 채 징병됐다 하더라고 이들 내면에 자리잡은 극심한 패배주의와 삶에 대한 의욕 상실, 나아가 본국으로 생환해봤자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비참하고 끔찍한 빈곤과 나태 그 이상이 아니는 절망감은 거의 대부분의 로마군의 전투의욕을 대단히 크게 저해했다. 그래서 이들은 기본적으로 대단히 낮은 사기를 지닌 채 형편없는 무장으로 싸우게 되었고, 결국 킴브리 전쟁에서 과연 이게 한니발의 카르타고와 그토록 용감하고 장엄하게 싸운 그 로마군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의 졸전을 이어가며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게 한다.

또한 로마 당시 군제는 비효율적 편제로 그 스스로의 군사력을 약화했다. 개인들이 직접 자신의 장비를 구입해서 가져가야 한다는 방식의 무기보급은 고위 장교가 사병들을 일률적으로 훈련시키거나 지휘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로마 공화국에서는 사병들에게 무기와 장비를 지급해주지 않았다. 무기와 장비를 마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병들 스스로였다. 전 주에 배운 켄투리아회의 재산요건을 다시 한번 봐보자.

제5계급까지는 “벨리테스”라는 병종으로 분류되어 징병되었다. 벨리테스들은 작고 둥근 방패와 투척용 창, 돌팔매용 가죽끈과 돌로 무장한 경보병대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도대체 “투척용 창”이 무엇이고 “돌팔매용 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더 중요한 “작고 둥근 방패”의 규격은? 여기에서 켄투리아회의 재산산요건 중 제 5계급까지의 요건을 맞춘 이들은 각자 나름대로 가능한 방식대로 장비를 마련해서 군복무를 수행하려 노력하겠지만, 그들이 각자 집에서 바리바리 싸들고 온 조잡한 무기들이 얼마나 획일적이지 않고 중구난방일지를 생각해보자. 군지휘관들은 이들을 어떻게 편제해서 전술을 구사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골머리를 썩어야 했을 것이다. 당연히 벨리테스들이 군대에서 큰 활약을 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큰 사각방패와 글라디우스로 무장한 다음 계급 병종들, 즉 “하스타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큰 방패는 무엇일까? 짧은 검을 가지고 오라고는 하는데, 도대체 얼마만큼의 길이로 연마된 검이 필요할까?        그리고 이러한 사소한 장비 차이보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당시 난잡하게 섞여서 헷갈리는 군복의 색깔과 방패와 장비에 새겨진 상징들이었다. 어느 지역에서는 푸른 색을 좋아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붉은 색을, 어디는 노란 색을 좋아했다고 해보자. 그래서 이들이 군대로 가기 전에 그들 부족들은 나름대로 그들이 좋아하는 색으로 장식된 방패, 갑옷을 쥐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한 부대에 모여 훈련을 받고 지휘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면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힘들어진다. 또한 그 지역이나 가문, 부족을 상징하는 동물이나 상징도 각자마다 달랐기 때문에 로마군의 상징인 아퀼라 혹은 사자와 헷갈리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고 한다.


2.     가이우스 마리우스 – 여포 같은 천상군인

하지만 가이우스 마리우스(이름이 둘 밖에 없는 것으로 그가 평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장군은 이러한 로마 군 내부의 문제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당장 그의 집안도 날품을 팔아 하루하루 살아가던 빈곤한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는 마리우스가 강인한 군인정신을 타고난 사람이지만 정치적인 감각이 부족해 말년에 비참한 최후을 맞이했다고 전한다. 일련의 묘사들에 따르면 마리우스는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과 싸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병사들과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침상에서 자고, 심지어 로마 군의 상징인 진지공사까지 병사들과 함께 하면서 평민 출신 병사들의 큰 존경을 받았으며 그 스스로 유구르타 장교들과 일기토를 벌일 때도 백전백승이었기 때문에 병사와 장교, 나아가 본국의 원로원에까지 그의 명성이 퍼진다. 심지어 당시 포에니 전쟁을 수행하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나 스로부터는 “여기 다음 세대의 지휘관이 있잖소!”라는 극찬까지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그에게서는 관우의 무마취 수술 설과 비슷한 설화가 전해진다. 그가 전쟁터에서 병을 얻은건지, 종아리 양쪽에 끔찍한 종기로 앓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의사들이 와서 마리우스의 종기를 제거하는 수술을 하려 하자 마리우스가 그까짓 종기 아프지도 않으니 그냥 무마취로 긁어내라는 소리를 했다고 한다. 당시 의사들에게는 이런 수술이 큰 고통을 동반하기에 몸부림을 칠 가능성이 높아 수술에 지장을 줄 수 있기에 온 몸을 밧줄로 묶고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입에 수건을 물렸다고 한다. 그런데 마리우스는 종기제거 수술을 받는 동안 어떠한 미동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다음과 같은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이까짓게 수술이라면 그냥 종기도 나랑 같이 붙어서 사는게 더 났겠군!”


3.     군제개혁의 배경

아무튼 그러한 마리우스는 엄청난 전투력과 지휘력, 나아가 모든 로마 군인들로부터 받는 큰 존경심에 힘입어 그가 손대는 모든 전쟁은 승리로 끝나는 마이다스의 손처럼 되어있었다. 그러다가 그에게 인생역전의 기회 와도 같은 전쟁이 찾아오니, 바로 게르만족과 벌어졌던 킴브리 전쟁이다. 그는 유구르타 전쟁까지 승리로 이끌면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때마침 전개되고 있던 킴브리 전쟁의 영향으로 평민 출신 집정관에 당선되는데 성공한다.

당시 로마인들이 킴브리 전쟁으로 가지게 된 공포감은 극도로 위험한 것이었다. 더 이상 로마인들의 용맹함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     전투력의 약화 – 노레이아 전투

당시 원로원은 켄투리아회 선거법 개정으로 무산계층인 프롤레타리아 계층에게도 켄투리아 193표 중 5표를 대충 던져주고 이들에게도 병역의무를 부과하는 편법을 부려 군자원을 확충하려 했다. 재산요건을 갖추지 못해 벨리테스로도 군복무를 하기 어려워진 빈민층이 너무나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에서 징병된 빈민층은 제대로 된 무기를 장비하지도 못했고, 극심한 가난과 빈곤 속에서 징병되어 온 삶 속의 희망을 찾지도 못해 적극적으로 싸우지도 않는다. 그래서 당시 건장한 게르만족 전사들과의 싸움에서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패배한다.

당시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은 게르만족을 기만하는 전술을 세우고, 거의 승리할 수밖에 없는 전략에 따라 수적으로도 우월한 싸움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게르만족이 원하는 것은 수많은 이주민들이 정착해서 살 수 있는 토지였기 때문에 카르보는 그들에게 정착할 곳을 주겠답시고 노레이아로 성공적으로 유인해낸다. 게르만족은 노레이아로 유인된 직후, 퇴로가 없는 지역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로마군의 기습공격을 받았기에 꼼짝없이 전멸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게 왠걸, 오히려 로마군이 게르만족에게 참패해서 1만명의 전사자, 2만4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해버렸다고 한다.

당시 이 사건은 원로원에서 대단히 엄중하게 다뤄졌다. 카르보가 세운 전략은 타당한 것이었고, 도저히 질 수 없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로 중 한명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2차 삼두정치 주인공인 그 안토니우스의 조부)는 오히려 카르보에게 적과 내통한 죄를 물었으며, 카르보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유죄판결까지 받게 되자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이해가 안되는 졸전은 당시 쇠약일로를 걷던 로마군의 전력 그 자체에 있다고 분석한다. 평민들은 싸울 의지를 잃었고, 적절한 장비 없이 싸울 수도 없었다.


2)     무능한 정치군인들의 득세 – 아라우시오 전투

다음으로 로마인들이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DNA속에서 게르만족을 두려워하게 만든 끔찍한 전투가 이어진다. 무려 12개 군단과 보조군들이 몰살을 당한 바로 아라우시오 전투이다. 이 사건 이후로 로마인들, 이탈리아인들은 게르만족, 독일인에 대해 끔찍한 전투민족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데, 실제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게르마니아 원정 당시 게르만족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러한 뿌리깊은 공포심을 극복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했다고 할 정도의 심각한 사건이었다.

당시 원로원은 게르만족을 막기 위해 현 집정관 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평민 출신 신참자)와 전직 집정관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이끄는 군단병들을 파견한다. 다시 말해 당시 상황은 집정관급 군대가 총출동을 할 정도로 심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퀸투스는 되도 않는 신분론을 들먹이면서 막시무스와 함께 싸우기를 거부하며 막시무스의 전공을 억지로 넘어서고자 무리한 전술을 구사한다. 퀸투스는 현직 집정관인 막시무스가 합법적인 지휘권에 입각해 론 강에 있는 자신의 진영에 합류하라고 명령하지만, 퀸투스는 파트리키 가문 출신인 자신이 평민 출신한테 명령을 받는 것을 굴욕이라고 판단해 핑계를 대며 진영을 나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막시무스가 게르만족과 강화회의에서 어느정도 성과를 내며 휴전을 이끌어낼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자 퀸투스는 이대로 가다가는 명문 파트리키 귀족 집안인 자신이 평민 출신에게 군공을 빼앗일 것을 우려해 킴브리족 진영을 무단, 단독으로 기습공격하는 일을 저질렀다. 그런데 이때 게르만족의 수가 더 많았고 충동공격을 감행했기에 전술적으로도 문제가 많아 군단병들은 몰살을 당해버리고 퀸투스는 패주한다.

당연히 한쪽 군단이 궤멸했으니 막시무스의 군단도 무사할 리가 없다. 막시무스의 군단병들은 게르만족들의 무시무시한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고, 이들이 저지른 잔학한 학살과 인신공양 제사에 대한 소문이 사기를 지속적으로 떨어트렸기에 막시무스의 군단병들도 궤멸하게 된다.


4.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원로원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당시 지중해 패권국이었던 로마가 게르만족의 침입에 의해 멸망할 위기에 봉착한다면, 이는 로마만의 위기가 아니라 지중해 세계 전체의 질서와 균형에도 심각한 변화를 끼칠 것이 분명했다. 마리우스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집정관에 당선된다.

군사적 위기가 도래하고 있을 때 마리우스가 가지고 있던 엄청난 군공과 전투력이 대중들, 나아가 귀족들에게 얼마나 큰 인기를 가져다줬을지 상상해보자. 나아가 그는 자신의 군경력, 나아가 원로원에서 선포된 국가비상사태 선언을 해결할 대안으로 대대적인 군제개혁을 선포했다.

당시 군제개혁은 단순한 군대 재편 이상의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사회 전체를 갈아엎는 사회개혁적인 차원의 전면적 개혁을 동반해야했기 때문이다. 그의 군제개혁은 크게 세 가지 차원으로 정리될 수 있다.


1)     모든 장비의 국비 지원

마리우스는 모든 군단병의 장비들을 로마 국가 예산으로 지급하는 결의안을 연달아 통과시켰다. 애초에 로마 군단병들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제대로된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가산을 탕진하게 된다면, 이들이 전쟁에는 참여할 수 있을지라도 전쟁이 끝난 이후에 걸인이 되어 사회 빈민층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욱 주목할 점은 마리우스가 지급하기로 결정한 장비가 당시로서는 “최고급”에 “최신예” 장비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병종은 대략 벨리테스,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에퀴테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서 프린키페스는 제 1계급 군단으로서 사슬갑옷에 투창 3개 정도, 글라디우스, 스쿠툼이라는 큰 방패로 무장한 최정예 중보병대이다. 그런데 마리우스는 모든 병사들에게, 심지어 프린키페스보다도 더욱 훌륭한 장비를 지급하는 결의안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병종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로마 군단병의 무장을 갖춘 병종이다. 이들은 프린키페스 무장에서 철갑옷까지 두른 형태로 더욱 강력한 무장을 갖추고 있다. 이로서 사실상 벨리테스,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병종은 구분은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사라지고 모두 마리우스식 군단병 편제로 흡수통합된다. 그리고 벨리테스는 “보조병” 내지 “용병”, 하스타티는 “신참 병사”라는 의미, 프린키페스는 “고참 병사”라는 의미, 에퀴테스는 “고위 장교”의 의미로 변화되면서 마리우스식 군제개편에 크고 작은 계급변화에도 큰 영향을 준다.


2)     군대는 짬이야!

이제 모든 병종이 하나로 통합됐다. 그렇다면 군인 간 계급은 무엇으로 구분하게 되었을까?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전에는 소위 말하는 “재산”이 계급이었다. 재산에 따라 말과 종자들을 데리고 가면 에퀴테스 계급이고,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구분이 의미가 없어졌으니 계급은 다른 요건을 중심으로 나뉘어야한다. 그것은 바로 “짬”이다. 물론 전공에 따라 계급이 오르내리는 것은 기본이다.

이제 군단병들은 새롭게 사용되는 하스타티, 프린키페스의 개념에 따라 신참병과 고참병으로 나뉘어 서로를 비교하고 위계를 새우게 된다. 그렇다. 누구든 다른 병사보다 고참이면 그 병사보다는 프린키페스가 되는 것이고, 고위 장교라도 그보다 더 짬이 높은 장교 앞에서는 하스타티가 될 뿐이다.


3)     모병제 실시 – 실업자 구제

나아가 마리우스는 더 이상의 징병제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를 도입한다. 더 이상 군복무를 원하지 않는 로마인은 강제로 군복무를 하지 않아도 된다. 마리우스가 이러한 개혁을 실시한 이유는 어차피 대다수의 빈민들이 군대를 기피하고 있었으며, 그들을 군대로 끌고 간다고 별 도움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모병제의 도입은 군인들에 대한 엄청난 처우개선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장비 지급, 술라 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봉급”과 “연금”의 지급, 나아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이르러 시작되는 고참병들에 대한 “토지지급” 등에 대부분의 로마 빈민들은 엄청나게 환호했다.

당시 로마 시내의 빈민들은 사실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일자리는 노예들에게 빼앗기고, 땅은 팔리고, 그렇다고 그들이 무언가 창조적으로 새로운 산업을 이끌어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 이들이 마리우스 이후의 군단병에 입대할 수 있다면, 최소한 먹고 살며 생활하는데는 지장이 없어지게 된다. 최소한 제대로 된 장비라도 무상으로 지급된다면 군대에서 배급되는 군량미라도 축내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운이 좋다면 훌륭한 군공을 세워서 입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로마 군단병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센츄리온”, 즉 백부장 계급이 떠오른다. 백부장 계급은 우리나라로 따지면 주임원사 정도의 장교인데, 하급 장교이지만 그 “짬빨”로 고위 장교들로부터도 엄청난 존경심과 대우를 받았고, 그 자체만으로도 사회에서 준귀족급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술라 이후 엄청난 퇴직금과 연금, 나아가 카이사르의 토지개혁 이후 받게 될 안정적인 토지와 함께 로마 사회를 견실하게 이끌 중산층에 편입된다.



4)     중앙집권적 편제의 가능성

그리고 국가의 무기지급이 가지고 있는 편제상의 장점이 생긴다. 바로 지휘관들의 지휘에 편의가 생기기 때문이다. 마리우스는 앞으로 사용될 로마군기의 상징을 “아퀼라”, 즉 독수리로 고정한다. 앞으로 로마군의 방패나 장비에는 독수리만이 새겨져 지급될 것이며, 모든 군단병의 장비는 붉은 색과 노란 색이 결합된 형태로만 제작되어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기 용이해질 것이다. 또한 그들이 사용하는 글라디우스, 필룸, 스쿠툼의 규격 역시 통일되어 군단병들이 함께 훈련받고 지휘받는 데도 용이해질 것이며 전반적인 지휘의 효율성도 증대될 것이다.



5)     킴브리 전쟁의 승리

이러한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덕분인지, 갑자기 로마군이 저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예전 같았으면 원로원의 이름으로 애국적인 호소를 곁들인 모병까지 해야 간신히 병사들이 모였다면,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로마의 빈민들이 대거 몰려들어 군단병에 자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 장비가 제대로 지급된다면 아무것도 안하면서 빈민굴에서 술이나 먹고 시간이 지나가기만 기다리는 것보다는 군단병에 복무하면서 전공을 쌓는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군제개혁 덕분에 증가한 군인들의 양적 수와 질적 향상, 나아가 마리우스의 천재적 군사재능은 로마를 국가비상사태로부터 구원하는데 큰 힘이 되었으며 그가 7번 연속으로 집정관에 당선되는 계기가 된다. 군제개혁 이후 마리우스는 “제 3의 건국자”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으며 “가이우스 마리우스 테르티우스 콘디토르”가 된다.

그런데 이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마리우스를 비롯한 “평민파”들이 득세하면서 원로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귀족들이 내분을 일으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이 가장 문제삼은 것은 로마의 “참정권”을 이탈리아에 있는 다른 동맹 도시들에게도 확대시켜야 할지 여부였다. 마리우스는 모든 이탈리아인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해줘야 이들이 로마를 위한 모병에도 참여해주고, 이후 식민지 개척이나 본토방위를 위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 참정권 확대를 적극적으로 주도한다. 하지만 참정권은 특권이다. 과연 원로원은 동맹시에게도 참정권을 확대해줄 것인가!?


5.     동맹시 전쟁

강의록을 만들고 나니 동맹시 전쟁 관련한 내용은 다음주에 하는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이 시작되는 구도가 형성되거든요! 동맹시 전쟁은 다음주에 ㅎㅎ


6.     생각해볼 것들

- 만약 무기를 군인들이 직접 집에서 구입해서 전쟁터로 가면 전투력이 어떨까?

- 군인들이 봉급을 못받는 채로 군대에 입대하면 경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까?

- 나라에서 모든 군인들에게 무기를 일괄적으로 지급하는 군대와 그렇지 않은 군대 간 전투력의 차이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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