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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가지 않은 길 Oct 17. 2022

구매 수첩

사우디 풍경

  무길이 아침 출근을 하니, 미리 와 기다리던 5공구 자재 담당 하기사가 다그쳤다.

  “공구도 없이 어떻게 일을 하느냐고 아우성이요. 신청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여태껏 소식이 없으니, 나만 중간에 끼어서 죽을 지경이란 말이야.”

  “전기톱하고 전동드릴 말이지?.”

  “그래요. 오늘은 세상없어도 사줘야 해.”

  그가 무길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하기사도 그렇겠지만 나도 정말 힘들어. 뭐, 차가 있어야 말이지. 사람 다섯이 차 두 대로 이동하며 무슨 일을 보느냐고.”

  각 공구에서 요청하는 물품은 다양하고 수량이 많은데, 자재부는 기동력이 받쳐 주질 않았다. 건설회사에서는 모든 게 현장 위주여서, 차량을 현장에 우선 배정하고 난 후에야 행정부서 차례가 왔다. 최 소장은 1차 공사대금 받기 전에는 자금 사정이 허락질 않는단다.

  “오늘은 여 과장님과 서형이 다란을 가야 한다니, 나도 그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밖에. 최선은 다하겠지만 나 혼자 다니는 게 아니니 오늘은 장담 못 해요.”

  하기사의 얼굴이 벌게졌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어쩌자는 거요? 배짱이야?”

  그의 말투가 싸우려는 사람처럼 거칠어졌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요. 발이 묶였으니 난들 어쩌겠어.”

  하기사가 생각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구매자에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했다. 

  “···그럼 우리 공구 차로 같이 나갑시다. 나중에 공구장에게 무슨 소릴 들을지 모르지만. 오늘도 빈손으로 가면 작업자들이 나를 죽일지도 몰라.”

  공구장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하기사 단독으로 결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대신 그동안 청구한 물품을 다 사준다고 약속해. 그래야 내가 오전 내내 차를 쓴 명분이 서지.”

  “좋아. 5공구 물건이 최우선이요”

  무길은 구매 요원으로서 날개를 단 셈이었다.

                



  시내에 오면 하기사는 궁금한 게 많았다. 

  “저게 다 돈 주고 사 온 거 아니요. 저런 야자수를 수입해 심으려면 한 그루에 얼마나 들까?”

  시내 곳곳에 아름드리 가로수를 심는 광경을 보고하는 말이었다. 

  “글쎄 누가 알겠어.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심는 것도 그렇지만 물 없는 나라에서 매일 물을 줘야 하니 유지비용이 엄청나대.”

  무길이 오마르에게서 들은 얘기였다. 

  “돈이 넘쳐나는 나라니 안 되는 일이 없구려.”

  “저런 거야 돈이 많이 들어도 할 만한 일이겠지만, 도시 지방성에서 ‘스톰 워터’라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라는데 그건 정말 황당해.”

  “어떤 건데?”

  “폭우에 대비해 배수 시설을 설치한대.”

  “원 참. 사막에서 폭우는 뭐고 배수 시설은 또 무슨 말이래?”

  “얼마 전처럼 이곳도 1년에 3, 4일 정도는 소나기가 쏟아진대. 그때를 대비해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한 프로젝트라네.”

  “와-아, 정말 미치겠군.”

  하기사가 어이가 없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눈길이 이번에는 도로변에 전시된 사고 차량으로 쏠렸다. 사우디 경찰은 시내 곳곳에 높다란 기둥을 세워놓고, 그 위에 흉측하게 찌그러진 사고 차량을 전시해 놨다. 

  “어떻게 저 지경이 될 수 있지? 종이를 마구 꾸겨 놓은 거 같네. 저 차 사고 현장은 얼마나 끔찍했을까?”

  “그러게 말이야. 평소에는 굼벵이처럼 느리다가 차만 타면 왜 그렇게 급해지는지. 사우디 교통사고 발생률이 세계 최고래. 이곳에서는 자기만 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항시 방어 운전을 해야 해.”

  “그래서 과속 방지턱이 그렇게 무지막지하구먼. 강형도 조심하쇼. 근데 강형, 면허증이나 있는 거요?”

  바로 그 순간, “으아-앗”하기사가 눈을 홉뜨고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불과 5m쯤 전방에서 두 명의 아랍 여성이 갑자기 무단 횡단을 시도하고 있었다.

   삐이-익 소리를 내며 차가 아슬아슬하게 그녀들 앞에서 멈춰 섰다. 

  “어-후유” 둘이 동시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10년 감수했네.”

  하기사가 가슴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소.”

  무길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저런 거 정말 조심해야 해. 아랍 여성들은 옆을 둘러보면 안 되거든. 사고가 나면 전적으로 운전자 책임이야.”

  “강형 하는 일이 신선놀음인 줄 알았더니, 시한폭탄을 안고 다니는 일이구려.”

  하기사가 연신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600리얄.”

  공구상회 알 호잔의 지배인 샤리프가 무길이 가리키는 전동드릴 값을 말했다.

  “그렇게 터무니없이 부르면 되나? 지난번에는 300리얄이었는데.”

  무길이 가방에서 꺼낸 구매 수첩을 뒤져보고 말했다. 

  “그건 다른 브랜드였겠지. 이건 보쉬야, 보쉬.”

  “무슨 소리. 그때도 보쉬였는데 뭘. 모델 번호도 똑같고. 여기 적어 놓은 게 있는걸.”

  무길은 처음 사는 고가품은 꼭 구매가를 적어 놨다. 그들은 저 유명한 아라비아 상인으로, 처음에는 값을 낮게 부르다가 은근슬쩍 올리는 상술을 썼는데, 무길의 구매 수첩 앞에서는 그런 게 통하지 않았다. 

  어떤 상인은 그의 수첩을 들여다보기도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가 아라비아 숫자 대신에 한자를 사용했으니 말이다. 그들은 한자 숫자를 암호라 여기고 ‘미스터 강, 와지트 무흐(머리가 대단히 좋다.)’를 연발했다. 

  “300리얄? 나는 뭘 먹고살라고? 그건 첫 거래라 원가 이하로 준거야. 밑지는 가격이라고. 종전 가격이 그렇다니까 최대한 할인을 한다 해도 500리얄 아래로는 곤란해.”

  이런 경우 상인들은 지금처럼 그 가격으로는 이문을 남길 수 없다고 엄살을 부리기도 하고, 물건값이 올라서 어쩔 수 없다고 둘러대기도 했다. 

  “그럼 400리얄. 전보다 100리얄이나 더 주는 거잖아. 다른 가게에서도 그 가격이면 충분해.”

  무길은 다른 상점에 가도 450리얄 아래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시치미를 뗐다. 지난번 가격은 원가 이하라는 샤리프의 말이 터무니없지 않을 터였다. 

  “젠장, 마지막이야. 450리얄에 살 테면 사고 말 테면 말아. 첫 손님이니까 그냥 매상 한 건 올리는 거지 남는 건 없어.” 

  이쯤 되면 응해야지, 이 나라에서 흥정할 때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산통이 깨진다는 걸 무길이 알고 있었다. 

  “샤리프가 양보하니 나도 더는 고집부리지 않겠네만, 앞으로도 계속 이 가격이야, 알았지?”

  무길이 못 박기를 잊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아침부터 속이 더부룩하더니 갑자기 대변이 급해졌다. 샤리프에게 휴지를 요청했으나 그의 대답은 황당했다. 

  “휴지가 무슨 소용이야. 화장실에 물이 있는데.”

  “물?”

  사우디 화장실에는 주전자 모양의 용기가 비치돼 있는데 그 속에 물이 담겨있다.

  “그래, 워터. 왼손가락으로 변을 닦아내고 물로 씻으면 되잖아.”

  “맙소사! 어떻게 그렇게 하란 말이야!”

  그도 사우디 사람은 왼손으로는 변을 닦고 오른손으로는 밥을 먹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왜? 물로 닦는 게 깨끗하지. 항문 주위에 붙어있는 똥을 종이로 문질러대면 어떻게 되겠어? 그건 너무 불결해. 워터 이즈 굿!”

  더 떼써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한데 자재골목을 그렇게 다녔어도 화장지 파는 곳을 본 적이 없었다. 이젠 당장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그는 왼손가락에 중대한 임무를 부여했다. 


  배관 상점, 전기 상회, 페인트 가게, 주방 기구 점 ······ 하기사는 오전 내내 무길을 따라다녔지만, 사야 할 물건을 반도 구매하지 못했다. 사려는 사람은 마음이 급한데, 흐느적거리는 흰옷을 걸친 상인들은 만사태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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