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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가지 않은 길 Mar 26. 2023

고무신을 거꾸로(1)

카바레

  남편을 머나먼 타국으로 떠나보낸 은희에게 남편의 빈자리는 너무 컸다.

  밤에 자다 일어나 보면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도와줄 사람이 없고, 몸이 아플 때 돌봐주는 사람이 없고, 부부동반 모임에는 홀로 가야 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틀에 박힌 생활 ― 아침 먹고, 아들 학교 보내고, 청소하고, 점심 먹고, 시장에 다녀오고, 저녁 먹고, TV 보고, 자고, 일어나고 ― 은 숨 막히는 일이었다.

  더욱이 한창 젊은 여인이 끓어오르는 욕정과 싸우며 기나긴 밤을 혼자 넘는 것은 형벌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한 달 두 달이 가고, 반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여고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춘자야.”

 “어머, 오랜만이다. 너···어···이혼했다며?”

 “뭐 그렇게 숨길 일도 아니야. 가부장적 사고방식 넌덜머리 나.”

 “어쨌든 용감하다. 여고 시절 서춘자가 어디 가나?”

  "네 남편 사우디 갔다며? 이제 너나 나나 같은 신세다. 서방을 차버리고 혼자된 년이나, 먼 나라에 보내고 혼자된 사모님이나, 싱글은 마찬가지지. 그래 혼자 어떻게 지내시나?”

  “따분해 죽겠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고.”

  “어휴, 이 답답아. 꽃 같은 청춘이 곰팡이 슬겠다. 남편이 보내주는 돈도 많을 텐데 적당히 즐기면서 살아라. 혼자되니까 옆에 있는 놈 눈치 볼 필요 없고 훨훨 나는 기분이다.”

  “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니?”

  “그래, 나와. 집 안에서 궁상떨지 말고. 선배 싱글이 지도 좀 해주지.”


  화끈하게 놀자는 춘자를 따라 그녀는 생전 처음 카바레에 들어섰다. 오색 불빛이 난무하는 속에 떠나갈 듯 터져 나오는 디스코 음악 소리에 맞춰, 수많은 남녀가 어우러져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시장과 집만 오가던 그녀의 일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 하늘 아래 이런 곳도 있구나 하며 눈앞의 광경에 넋을 잃었다.


  서울 구경 처음 하는 섬마을 아줌마처럼 주눅 들어 있는데, 춘자는 어느새 사람들 틈에 끼어 한껏 끼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잡아끌었으나, 은희가 겁먹은 아이 뻗대듯 움츠러들었더니, 혼자 뛰쳐나갔다.

  디스코 음악에 이어 부드럽고 분위기 있는 블루스곡이 흘렀다. 조명도 분홍색과 보랏빛이 어우러져 핑크빛 분위기를 돋웠다. 춘자는 어느 틈에 파트너를 만나 한껏 로맨틱한 무드에 빠져있었다. 상대가 마음에 들었는지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스텝을 밟았다. 서로의 몸이 스칠 때는 몸서리라도 칠 것 같았다. 핸섬한 외모에 키가 훤칠하고 탄탄한 근육질의 소유자로 한눈에 여자 마음을 훔칠 남자였다.

  곡이 끝나자 춘자는 그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멋진 남자가 은희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합석했다.

  “춤 실력이 대단하시네요.”

  춘자가 맥주를 권했다.

  “뭘요. 호흡을 잘 맞춰주시니까 그렇죠.”

  그는 성우급의 달콤한 목소리를 가졌다. 좋다고 생각하니 모든 게 다 좋아 보였다.

  “옛 애인을 만난 듯 편안하고 황홀했어요.”

  춘자가 남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강렬했다.

  그러나 그는 춘자와 얘기를 나누면서 은희에게 한눈을 팔았다.

  “저도 역시 즐거웠습니다.”

  얼마 후 문득 정신이 든 듯 그가 답했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건지, 그는 첫인사에서부터 술잔을 주고받는 에티켓이며 말하는 매너가 세련되고도 진실해 보였다. 어떻게 저런 분이 이런 곳에 와 있을까 의아스러웠다.

 

  맥주 세 병이 비워지자 그가 은희에게 한 스텝 청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가 먼저 제안하고 싶던 차였지만, 춤춰본 적이 없어 몸을 움츠렸다. 그가 걱정 말고 가르쳐주는 대로만 하면 된다며, 그녀를 무대로 이끌었다.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 논 남자와 손을 맞잡고 서니 대책 없이 가슴이 벌름거렸다. 그의 설명에 따라 한발 한발 발을 옮기며 스텝을 익혀나갔다. 베이식, 지그재그, 내추럴 턴, 리버스 턴, 오픈, 백 크로스 ······

  “대단한 미인이십니다. 어쩌면 그렇게 피부가 고우세요.”

  달콤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녀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맞잡은 손에 땀이 돋았다. 심장 박동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봐 신경이 써졌다.

  “거기는 왕자님 같으세요.”

  얼마 후에야 떨리는 목소리로 답례했다.   

   

  운동 신경이 발달한 그녀의 학습 능력은 뛰어났다. 한 시간이 지나자 어설프게나마 전 코스를 소화해 냈다. 그의 과분한 칭찬을 들으며 풀코스를 반복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갈수록 그녀의 발동작이 빨라졌다. 몇 번째인가, 베이식 지그재그에서, 내추럴 턴을 시도하는데 그만 스텝이 엉켰다. 몸의 균형을 잃고 발을 헛디디는 순간, 악! 그가 비명을 지르며 발을 움켜잡았다. 은희의 하이힐이 그의 발등을 찍은 것이었다.

  “어, 어머나! 죄, 죄송해요,”

  그녀가 당황해 어쩔 바를 몰랐다. 생각보다 충격이 심한 모양이었다. 

  그가 바닥에 뒹굴며 고통을 이기지 못했다. 이를 악물고 참아내느라 이마에서 진땀이 흘렀다.

  “어구, 어구, 아야야야~~~” 

  “이, 이 일을 어떡해, 어떡해! 이럴 게 아니라 빨리 병원으로 가시죠.”

  그녀는 정신을 못 차리고 허둥댔다. 당장 울음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가 두 팔을 딛고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가르치는 사람의 설명이 부족했던 탓입니다. 전적으로 제 책임인걸요. 이젠 괜찮습니다. 허허.”

  그가 고통을 참는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 깊을까. 속절없이 그에게 빠져들었다.  

  고통이 심할 텐데 그만 들어가자고 수 차례나 종용했지만, 그는 발을 절름거리며 곡이 끝날 때까지 그녀의 스텝을 잡아주고 발을 맞췄다.     


  테이블로 돌아오니 춘자가 단단히 삐져있었다.

  “내가 구해 온 파트너를 네가 독차지하는구나.”

  “어, 그게······.”

  은희가 말이 궁색해 우물거리자 남자가 대신해 말했다.

  “처음 배우는 분이라 제가 우겨서 그렇게 됐습니다.”

  그의 말은 다시 요란해진 음악 소리에 묻혀버리고, 싸우고 난 사람들처럼 세 사람 사이가 서먹해졌다. 은희는 슬금슬금 춘자의 눈치를 살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그가 정중하게 제안했다.

  “사과하는 의미에서 제가 저녁을 사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자 춘자가 금세 얼굴을 폈다.

   “사과하는 의미라고요? 그렇담 이번 한 번만 봐 드리죠. 호호.”

  식사보다도 그와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된 것을 반기는 눈치였다.  

   

  그가 안내한 한정식집은 널따란 주차장에 차가 빼곡히 들어찼다. 천장은 용마루처럼 장식됐고, 벽을 둘러가며 고풍스러운 동양화가 걸렸으며, 손님들은 귀티가 났다. 은희는 자신의 몰골이 초라해 보이지 않을까 옷매무시를 살피며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서빙하는 종업원이 사장님이라며 그를 VIP 대하듯 깍듯이 했다. 춘자는 마치 자기가 뭐라도 된 듯 우쭐했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그의 이름은 정대상, 나이는 그녀들보다 세 살 아래, 10명의 직원을 두고 무역업을 하는 사업가. 아내와는 지난해에 사별했는데,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다 보니 미쳐 아이 만들 생각을 못 했다며 껄껄 웃었다. 춤은 훌륭한 레크리에이션으로 상처한 후 마음을 달래는데 그보다 더 좋은 건 없다고도 했다.    

  

  춘자는 거리낌 없이 자신이 이혼녀라는 걸 밝히고, 혼자 산다는 점에서 정사장님과 ‘똑같은 처지’라며 그와의 공통점을 강조했다. 자신은 연하의 남성에 관심이 많다는 말도 덧붙였다. 은희 몫까지 대신해 그녀와는 여고 동창이며 ‘사우디 생과부’라고 했다가, 아차 싶었던지 후회의 표정이 역력했다. 이미 라이벌이 된 은희 역시 ‘같은 처지’가 돼서는 안 될 테니 말이었다.

  순간 대상의 눈이 반짝했다.

  “이런 미인이 혼자 지내시다니. 힘드시겠네요.”

  “정 사장님이야말로 힘드시겠네요. 금실 좋았던 분들일수록 혼자서는 못 산다고 하던데.”

  은희가 말을 더듬었다.

  “아내의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 마음이 헛헛할 때는, 아내가 아끼던 물건만 봐도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식사 내내 춘자는 대상의 관심을 끌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가 은희에게만 관심을 보이니 자존심이 상해 뾰로통해졌다. 그러는 동안 출출했던 배가 기분 좋게 채워졌다.      


  “저는 사업상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 카바레에 매일 옵니다. 업무 스케줄대로 움직이니까 같은 시간대죠. 이것도 인연인데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밖으로 나오자 대상이 말했다.

  “다음에도 이렇게 근사한 저녁을 사신다면 고려해 볼게요. 호호.”

  비위 살 좋은 춘자가 어느새 기분을 풀고 말을 받았다.

  “얘는, 무슨 염치로······.”

  은희가 춘자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뇨, 미인은 대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허허.”

  대상이 은희에게 다시 한번 시선을 꽂았다.

  그들은 약속 아닌 약속을 하고, 각자 기다리는 사람 없는 집으로 향했다.    



     

  버스에 몸을 실은 은희의 내부에서 거친 파도가 일었다. 외모가 출중하고 배려심 깊은 신사, 10명의 직원을 거느린 무역회사 사장님, 외모로 보나 경제력으로 보나 남편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가 내게 깊은 관심을 보였어. 내게서 눈이 떨어지질 않았어. 춘자는 안중에 없었어.······그래, 백마 타고 왕자님이 나를 찾아온 거야.

  연애 한 번 못해보고 부모 결정으로 결혼한 그녀가 생전 처음 이성에 대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버스 정거장에서 집까지는 꽤 멀고 언덕이 가팔라서 언제나 힘든데, 오늘 집으로 가는 길은 평소의 그 길이 아니었다. 나는 걸음으로 골목을 지나고 언덕길을 올라 집에 도착했다.  

   

  불을 켜고 방에 들어서니 아무도 없는 방을 가족사진이 지키고 있었다. 세 식구의 단란한 가정, 가족사진 옆에는 남편이 사우디에서 찍어 보낸 사진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광활한 모래밭에 서 있는 남편.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물건을 훔치려다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움찔했다. 내가 정사장과 어울려 춤춘 걸 알고도 저렇게 웃고 있을까?      


  TV를 켰다. 아무도 없는 집에 오면 음산한 분위기가 싫어 제일 먼저 하는 일이었다. 가수 현숙이 애절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아빠가 떠나신 지 사계절이 갔는데

  낯선 곳 타국에서 얼마나 땀 흘리세요.

  오늘도 보고파서 가족사진 옆에 놓고

  철이 공부시키면서 당신만을 그립니다.

  염려 마세요. 건강하세요.     

  당신만을 사랑하니까.      


  노래 가사가 그녀의 마음을 콕콕 찔렀다. 사막에 서 있는 남편도 이젠 웃지 않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하루를 되돌아봤다.··· 내가 오늘 뭘 했지? 꿈을 꿨나? 꿈속에서 무슨 이상한 곳에 다녀왔나?···아니, 한눈을 팔았구나. 그이는 저렇게 사막에서 고생하는데. 배은망덕한 년 같으니.

  이번에는 다른 생각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외로워. 남자가 그리워. 내 젊은 피가 이렇게 끓는걸. 밤이 무섭단 말이야.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길게 한숨이 나왔다.      




  다음 날. 아들을 학교 보내고 설거지를 끝낸 후 신문을 펴 들었다.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꾸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지난밤 꿈에 그녀는 이불속에서 대상의 품에 안겨 있었다. 둘은 알몸이었다. 살과 살이 맞닿으면 왜 그렇게 좋은지······. 꽃미남, 무역회사 사장에 대한 허영심, 무의식 세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입안에 침이 잔뜩 고여 있었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남편에 대한 배신행위야. 잡념을 쫓으려고 집안일을 시작했다.   

  청소도구를 제자리에 갖다 놓고 돌아서니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춘자가 다짜고짜 선전포고했다.

  “어제는 정사장의 관심이 네게만 쏠렸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해. 남자들이란 처음에는 여자의 외모를 보게 마련이지. 그러나 정작 승부는 남자를 얼마나 다룰 줄 아느냐에 달려있어. 반드시 그는 내 그물에 걸려들 거야.”

  여자의 질투심이 오뉴월에 서리를 내리게 한다던가. 전화선을 타고 오는 말이 다시 은희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제 남자로 만들겠다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렇게 멋진 남자를 왜 네게 뺏긴단 말이야. 겨우 가라앉으려던 마음이 다시 대상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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