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온도는 몇도 인가요?
나는 모든 게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듯이 보이는 것들을 부러워하고 그것들이 비로소 곧 행복이라고 여겼다.
이를테면 인스타그래이나 유튜브 등과 같은 각종 SNS에 나오는 화려한 인플루언서들이 사는 삶을 부러워하고, '이 사람들이 부족한 건 뭘까?'라고 생각하며 부족한 게 없어서 걱정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들의 행복은 막연하게 내 마음대로 재단했다. 그들이 공구하는 제품을 사 모으기도 하고, 무턱대고 그들의 불행을 바라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이 가진 것들을 내 손안에 넣어도 나는 좀처럼 행복해지지 않았다.
그들이 행복하다고 해서, 또 그들이 내가 바라던 대로 불행해진다고 해서 단숨에 그들의 행복이 나의 것이 된다는 건 애당초 바보스러운 소리였다. 그들이 행복해 보이기만 하는 것은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공간이라는 제약 아닌 제약 때문일진대. 무엇 때문에 내 비하인드와 그들의 하이라이트를 비교하며 불행을 자처한 걸까.
나는 그렇게 줄곧 본인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했다. 이대로 살기엔 내 삶이 너무나도 불행하고 처량했다. 나 자신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오늘과 내일, 그리고 어제의 나는 허구한 날 나를 외롭게 만들 뿐이었다. 이런 생각 자체는 비단 '나'만을 고독하게 하는 게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것들 나의 아이들, 나의 남편, 나의 친구들- 나를 비롯한 그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이런 식으로 나를 괴롭히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마음먹기까지 여러 일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의 계기는 이것이다.
내가 동경하던 한 인플루언서의 아이가 영아돌연사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충격이었다. 늘 행복으로 가득할 것만 같던 그녀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 이라니. 세상사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일을 바라보며 든 생각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저 행복하기만 하거나, 그저 모든 게 불행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아픔과 슬픔 안에서도 그녀는 지금 자녀를 낳아 여전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가 아프지 않았던 것은 아닐 테다. 부모, 형제, 조부모가 세상을 등졌을 때 칭하는 말은 제각각 있어도 자식을 잃은 슬픔을 통칭하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슬픔을 한구석에 몰아놓고 조금씩 꺼내어 보리라. 그렇지만 슬픔만이 아닌 감사와 사랑으로 인생을 채워나가는 모습이 정말이지 여느 금은보화와 견줄 바 없이 아름답고 찬란해 보였다. 다들 그렇게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본인의 시선이 닿는 곳들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것 아닐까.
이렇게 나는 오늘 나의 주변에서 내 시선을 기다리는 것들이 무엇일지 떠올려 본다. TV를 보면서 다이어트 댄스를 따라 추는 나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나도, 나도!" 하며 쫄랑쫄랑 오는 아이들. 그 틈에 씰룩거리는 방실방실 궁둥이. 박자가 안 맞으면 어떻고, 살이 출렁출렁하면 어떠하리. 이게 행복인걸. 나중에 아이들에게 춤 한번 춰달라고 사정하면 그때는 한번 춰줄는지 모르겠다. 행복에는 다 때가 있기에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그저 오늘을 오롯이 받아들이기로 또 한 번 약속해 본다. 그럼에도 이따금 나의 마음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시선이 머물러 '불행'이라는 두 글자가 내 체온을 파고들려 할 때 한없이 추워하지 말고 따뜻한 담요를 덮으리라. 나는 사실 하루하루 불완전하고도 미숙한 존재이기에 늘 성숙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적어도 추울 땐 장갑을 끼고, 목도리도 두르고, 나의 체온을 지켜내는 법쯤은 안다. 행복은 이렇게 나의 온도를 지켜내는 일이겠지. 추운 바람이 불어올 때 애써 버텨내기보다 겉옷을 꺼내 입고, 따뜻한 차를 우려내어 홀짝이기도 하며 나만의 온도를 지켜내는 것.
바로 그게 행복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