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의 첫 장편에서 만나는 삶의 가장 아픈 진실
예전부터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좋아했다.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처럼 거대한 주제와 묵직한 인물들,
도덕과 죄책감, 자유와 구원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이 인상 깊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데뷔작인 가난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읽지 않았다.
제목도 좀 평범하고, 분량도 다른 대작들에 비해 얇아서 “이건 덜 중요하겠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처음’이 궁금해졌다.
그가 처음으로 쓴 소설에서는 어떤 문장으로, 어떤 인물로 인간을 말했을까?
그게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의 출발점이라면, 분명 그 안에는 그의 전체가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얇은 소설은 너무도 깊고 아프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가슴을 찌른다.
이 소설은 두 인물, 마까르 데브슈킨(중년 남성 공무원)과 바르바라(가난한 친척 소녀)의 편지글로만 이루어진 서간체 소설이다.
두 사람은 같은 건물에 살며 서로를 부양하고 위로하며 편지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현실은 매우 가혹하다.
데브슈킨은 하찮은 말단 공무원으로, 극도의 빈곤 속에서도 바르바라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해주기 위해 자신의 식비를 줄인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짐이 된다고 느끼면서도, 그와의 관계에 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들의 편지에는 소소한 일상, 서로를 향한 애정, 가난의 절망, 그리고 점점 벌어지는 두 사람의 삶이 담겨 있다.
이 소설이 그리는 ‘가난’은 단순한 물질적 결핍이 아니다.
존엄의 상실, 자존감의 파괴, 관계의 왜곡이 함께 따라온다.
데브슈킨은 자신이 점점 ‘존재 자체로 초라해지는 경험’을 한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에게도, 직장에서 상사에게도, 연애 감정 앞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내가 초라하다는 이유로,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의 말투는 점점 더 굴욕적이고, 자기비하적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너무 오랫동안 왜곡돼 있었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그걸 너무 조용하고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더욱 아프다.
두 사람 사이에는 분명 애정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연애’라는 말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마까르는 자신보다 훨씬 젊고 예쁜 바르바라에게 아버지처럼, 연인처럼, 후원자처럼 복합적인 감정을 갖는다.
그는 바르바라의 편지 하나에 울고 웃고, 자신의 모든 존재 이유를 그녀에게서 찾는다.
하지만 바르바라는 끝내 그와의 관계에 ‘희망 없음’을 직시하고
다른 삶의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이 옳은지, 슬픈지는 독자가 판단해야 할 몫이다.
다만 분명한 건,
가난이라는 조건이 두 사람 사이에서 사랑마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을 다 팔아도 괜찮습니다.”
→ 데브슈킨의 절절한 헌신. 그러나 동시에 너무 위험한 자기 지움.
“사람이란, 언제나 사람으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 도스토옙스키의 윤리관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지점.
“가난은 수치가 아닙니다. 그러나 가난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눈빛은 수치스럽습니다.”
→ 이 소설의 핵심을 관통하는 문장.
가난한 사람들은 단순히 러시아 제국 시대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가난’은 여전히 존재를 침식하는 조건이다.
‘없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없는 나를 보는 타인의 시선과
그것을 내면화해버린 자기 혐오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을 통해
한 인간이 얼마나 고귀하게 사랑할 수 있고, 또 얼마나 쉽게 스스로를 지워버릴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데뷔작이자, 러시아 문단에 충격을 안긴 작품이다.
출간 당시 러시아의 문호 고골리는 이 책을 읽고 “새로운 천재가 나타났다”고 극찬했다.
그 후 도스토옙스키는 더욱 심오한 죄의식, 구원, 신, 자유의 문제로 나아가지만
그 출발점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애틋한 시선, 연약한 사람을 향한 연민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바로 그 원형이 담긴 작품이다.
이 소설은 정말 얇다.
하지만 이 얇은 책이 남기는 여운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워지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차마 쉽게 감상을 말할 수 없는 침묵이 찾아온다.
그리고 문득, 나도 누군가에게 너무 쉽게 ‘불쌍하다’는 눈빛을 보낸 적이 있었나 싶다.
혹은 누군가의 선의를 ‘민폐’라고 느끼게 만든 적은 없었나 돌아보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한 줄로 말할 수 없는 책이다.
하지만 단 한 문장은 남는다.
“사람은 가난해도, 사람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말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리고 그 말은 지금도, 너무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