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부인과 대기실에서 시작된 철학
이 책은 나에게 조금 특별한 책이다.
왜냐하면 아내가 산부인과에서 둘째를 출산하던 날, 옆에서 읽었던 책이기 때문이다.
첫째 출산 때는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다가 아내에게 두고두고 원망을 들었고, 이번에는 반성의 의미로 책을 꺼내 들었다.
그 책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었다.
하지만 읽다 보니, 이 책도 만만치 않았다.
페이지는 열심히 넘겼는데 내용은 자꾸 흘러가고, 눈에 들어오는 건 철학 용어와 난해한 문장뿐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3년이 지난 지금 기억나는 건 ‘중용’ 하나뿐.
그래서 최근에 다시 이 책을 꺼내 들고, 유튜브 강의도 듣고, 네이버 열린연단 강연도 찾아보며 정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조금씩 이 책이 말하고자 했던 ‘좋은 삶’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글은 그 정리의 결과이자,
당시에 나처럼 책장을 덮고 싶었던 사람들을 위한 작은 안내서다.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들려준 강의를 정리한 형식으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중심에 두고 있다.
우리는 ‘잘 산다’는 말을 참 쉽게 쓰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단순한 물질적 풍요나 순간적인 기쁨이 아니라
지속적인 삶의 방식과 인격의 완성에 관한 문제라고 본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善)은 무엇인가?”
그리고 거기에 대한 답으로 ‘행복’(Eudaimonia) 을 제시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감정적 만족이나 쾌락이 아니다.
이 지점부터 어려워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다.
그가 말하는 ‘행복’이나 ‘덕’은 현대인의 삶과는 기준이 전혀 다른 세계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Eudaimonia)은 단순히 ‘즐거운 기분’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다.
그건 마치 영혼이 고요하고 조화로운 상태에 이르러, 인간의 본성인 이성이 잘 작동하며
‘탁월한 삶’을 꾸준히 살아갈 때 가능한 경지다.
오늘날 우리는 기분이 좋으면 “행복해”라고 말하지만,
그에겐 감정은 부차적이다. 중심은 ‘이성이 주도하는 삶’이다.
게다가 그는 노예제 사회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시대 사람이었고, 여성은 미성숙한 존재로 간주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평등, 자유, 자율 같은 개념은 그 시대에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이런 배경을 모르고 읽으면, 문장의 뜻은 알겠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 하는 당혹감이 생긴다.
‘탁월성’, ‘중용’, ‘실천적 지혜’, ‘이성의 활동’, ‘영혼의 분할’ 같은 말들이
익숙하지 않은 철학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인간의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 이성적인 부분
* 비이성적이지만 이성에 순응하는 부분
* 전적으로 비이성적인 부분
이게 뭔 말인가 싶지만, 간단히 말하면
생각하는 나, 감정적인 나, 욕망하는 나 정도로 보면 된다.
하지만 책에서는 이 개념들이 반복되고 조합되어
‘덕’이란 무엇인지, ‘정의’란 무엇인지, ‘절제’는 어떻게 생기는지…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데 수십 페이지가 소요된다.
정신이 점점 흐릿해진다.
이 책은 애초에 학술적인 강의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 형식이 아니라 논증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것이 이러하므로, 따라서 저것도 그러하다.
하지만 A의 반례를 들 수 있으므로 B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가 얻는 결론은 C이다.”
이런 구조로 전개되니, 가볍게 읽기에는 참 부담스럽다.
게다가 번역문 특유의 단단한 문장들까지 더해져
처음 접하는 사람은 중도 하차하기 십상이다.
그는 행복을 “영혼의 탁월성에 따른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감정은 일시적이고 불안정하지만, 탁월한 활동은 지속적이고 안정적이다.
그래서 그는 감정이 아니라 ‘행위와 성품’의 수준에서 행복을 설명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솔직히 나와는 잘 맞지 않았다.
나는 행복은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결국 감정의 동물이고, 우리가 공부하고 돈을 벌고 아이를 키우는 이유도
어떤 감정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벅참, 기쁨, 성취, 안도…
삶의 원초적 동기는 늘 감정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성이 감정을 통제하고 다스릴 때 비로소 행복해진다’ 는 이 철학은
나에게는 조금 차갑게 느껴졌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는 건
‘기분 좋은 상태’가 아니라 “내가 잘 살아가고 있다”는 자기확신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 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말하는 ‘감정적 만족’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지는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덕은 습관에서 생긴다.”
우리가 정의로운 행동을 반복하면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용기 있는 행동을 반복하면 용기 있는 사람이 된다.
덕은 책을 읽는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
행동하고, 반복하고, 조율하면서 내 안에 자리 잡는 것이다.
이 점은 지금 시대에도 정말 강력한 메시지가 된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먼저 오늘 작은 실천부터 반복하는 것,
그게 결국 나를 만든다는 것.
이건 일, 관계, 육아, 무엇에나 적용된다.
나는 어떤 행동을 습관처럼 반복하고 있는가?
그 반복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중용’ 하면 흔히 “극단을 피하라”는 식의 말로 들리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단순히 ‘어중간한 선택’이 아니다.
그는 모든 덕은 두 극단 사이에서 적절한 비율과 맥락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용기는
* 겁이 많은 비겁함과
* 무모한 만용 사이에 있는 ‘적절한 판단과 행동’이다.
그 적절함은 상황과 개인에 따라 다르며,
이건 이론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실천적 지혜(phronesis)’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건 굉장히 현실적인 조언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적당히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맞는 판단’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
철학이 생활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고대의 언어, 낯선 개념, 학술적인 서술 방식은 초반부터 진입장벽이 높다.
하지만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 지금 내 삶은 괜찮은가?
출산 대기실에서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아내 옆에서 이런 질문들을 나 자신에게 조용히 던지고 있었다.
철학이라는 건 거창한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사는 삶의 맥락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자주 묻는 태도,
그게 철학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억하세요.
“좋은 사람은 실천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실천은 지금, 이 순간부터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