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고전을 읽고 싶어서 손에 잡히는 대로 읽던 시절이 있었다. 사회학과 출신이었던 나는 학부 시절 내내 마르크스, 막스 베버, 에밀 뒤르켐 같은 사회학의 창시자들을 따라 읽으며 사회라는 거대한 구조에 대한 이론적 틀을 배워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들이 말하는 사회라는 건,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거지?”
그 물음은 자연스럽게 고전으로 나아갔고, 특히 서양 정치철학의 시초로 불리는 플라톤의《국가》에 도달했다. 당시에는 서양 고전 번역으로 유명한 천병희 선생님의 희랍어 원전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이게 정말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 문장 하나하나가 낯설고, 논의는 자꾸 옆길로 새고, 처음엔 “정의가 뭐냐”고 하더니 갑자기 시인 이야기가 나오고, 영혼 얘기하다가 정치 제도를 설명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도 이 책이 서양 정치사상, 윤리학, 심리학, 종교, 교육, 예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때의 혼란을 붙잡고 다시 읽었다. 네이버 열린연단에서 관련 강의를 듣기도 했고,
해설서를 찾아보기도 했다.
이제야 아주 조금씩 그 세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때의 나처럼 이 책을 읽다 포기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길잡이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플라톤의 《국가》는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여러 인물들과 나누는 대화 형식으로 전개된다. 시작은 간단하다.
“정의란 무엇인가?”
하지만 이 질문 하나로 무려 10권(보통 한 권의 책 안에 10개의 장) 분량의 대화가 이어진다. 단순한 윤리적 개념 정의에서 시작해, 점점 더 복잡한 이야기로 흘러간다. 이상적인 국가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통치해야 하는지, 인간 영혼의 본질은 무엇인지, 참된 교육이란 무엇인지, 심지어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나아간다.
한마디로 ‘정의를 묻다가, 인간 존재 전체를 탐구하는 철학서’ 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개인의 ‘영혼’과 국가라는 ‘사회 전체’를 서로 닮은 구조로 본다. 국가는 인간 영혼의 확대판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국가를 구성하는 계층을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 통치자 계급은 이성적 판단을 바탕으로 나라를 이끄는 이들이다. 플라톤은 이 역할을 철학자가 맡아야 한다고 본다. 이들은 진리를 탐구하고, 감정이나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이들이다.
둘째, 수호자 계급은 용기와 기개를 바탕으로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하고, 내부 질서를 유지하는 전사 계급이다. 이들은 통치자의 명령을 따르며 국가의 힘을 상징한다.
셋째, 생산자 계급은 경제적 활동을 담당하는 계층으로, 농민, 상인, 장인 등 일상적인 생계를 유지하고 물질을 생산하는 사람들이다.
이 세 계층이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조화를 이루는 상태, 그것이 바로 ‘정의로운 국가’이다.
그에 대응되는 개인의 영혼도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플라톤은 본다.
* 이성은 인간의 이치와 판단을 담당하며, 영혼의 지도자 역할을 한다.
* 기개는 용기와 명예를 추구하는 감정적 에너지로, 이성이 옳다고 여기는 방향에 힘을 실어주는 보조자 역할을 한다.
* 욕망은 쾌락, 소유욕, 식욕 등의 본능적인 충동을 담당한다.
정의로운 개인이란, 이성이 중심이 되어 기개와 욕망을 조화롭게 통제하는 사람이다. 마치 정의로운 국가가 통치자, 수호자, 생산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질서를 지키듯 말이다.
플라톤은 이상국가에서 철학자가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철학자만이 ‘선의 이데아(진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욕망에 흔들리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며, 영혼의 질서를 유지할 줄 아는 이들이다.
물론 현실에서 이런 철학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플라톤 자신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책에서 우리가 당장 실현할 수 있는 국가를 말하기보다는, 인간 정신의 이상적 상태를 국가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
《국가》는 철학책인 동시에 서양 정치이론의 뿌리이자, 윤리학의 출발점이다.
플라톤이 생각한 ‘정의로운 공동체’와 ‘이상적 인간상’은 이후 수천 년 동안 정치철학과 사회이론의 기준점이 되어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부터 중세 기독교 신정국가론, 근대의 사회계약론, 심지어 20세기의 전체주의 국가 모델까지, 《국가》에서 출발하지 않은 사상은 거의 없을 정도다.
또한 인간의 영혼을 분석하는 방식은 심리학과 윤리학의 밑그림이 되었고, ‘이성이 감정을 다스리는 조화로운 인간상’은 오늘날 자기계발서나 교육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정치, 교육, 예술, 종교, 심리학… 거의 모든 분야에서 《국가》의 그림자는 길고 짙다.
《국가》는 단순히 문장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관점들을 낯설게 흔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철학자가 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하면, 오늘날 우리는 "그럼 교수님들이 대통령 하라는 건가?" 하고 웃을 수 있다. 하지만 플라톤이 말한 철학자는 단순한 지식인이 아니라, 진리를 직접 본 사람이고, 그러한 자만이 공동체를 올바르게 이끌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또한, 그는 예술과 시인을 공화국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술이 모방에 불과하고, 사람의 감정을 자극해 이성을 흐린다는 것이다. 이 주장 또한 현대의 가치관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런 식으로 《국가》는 생각을 계속 멈추게 하지 않고, 계속 질문하게 만든다. 그래서 어렵다. 동시에, 그래서 위대하다.
《국가》를 끝까지 읽고 나면, "이게 바로 내가 바라는 사회다!"라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나는 어떤 상태일 때 정의로운가?’, ‘공동체의 조화란 무엇인가?’, ‘진정한 통치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떠안게 된다.
나에게 이 책은, 단순한 고전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거대한 거울이었다. 그 거울 앞에서 나는 내 사고의 한계와 편견을 조금씩 마주하게 됐다.
만약 당신이 이 책을 펼쳤다가 덮었다면, 너무 자책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도 몇 번은 그렇게 했다. 중요한 건, 다시 펼쳤다는 사실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이 단순한 질문으로 인간 정신의 깊이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리고 그 여정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읽는 데 오래 걸려도 괜찮다. 이해가 안 가도 괜찮다. 《국가》는, 다시 읽을수록 더 많은 걸 꺼내주는 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