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사랑해요! (1)

내가 할 수 있는 건 손 잡아드리기

by 구슬붕이

요즘, 내 젊은 시절이 언제였나 기억나지 않는다.

스물여섯에 결혼했으니 내 또래 중에서는 결혼이 빠른 편이었다. 막상 결혼하고 보니 남편도 나도 막내에 가까운 서열이라 결혼할 때부터 시아버지, 시어머니께서는 연배가 많으셨다.

내가 2000년 12월에 결혼할 당시, 60대 초반이셨던 시부모님께서는 이제 80대 중반이 되셨다.

2025년 9월 시어머님 생신 때 두 사위 분께서 준비하신 생신떡케잌. 17세처럼 살아가시란 마음을 담으셨다. 한 살 어리신 아버님께서 당겨 받으신 생신케잌이기도 했다.

몇 년 전부터 아버님께서는 외출을 싫어하시고, 귀는 어두워지셨다. 크게 달라지신 점은 부쩍 잠이 많아지신 거였다.

작년 여름 즈음, 아버님께서 갑자기 새벽에 집을 나가셔서 혼자서 못 돌아오셨다. 온 가족이 찾으러 나갔다. 혼자 집 밖으로 나가시는 일이 거의 없으셔서 예상 못했던 일이었다. 그날, 어머님의 연락을 받은 큰누님께서 오전에 실종신고를 하셨다. 단순가출인지 헷갈려하는 토요일의 경찰관들(그래도 서울이니까 찾으러 순찰차로 동네 한 바퀴 정도 한번 나가보기는 했다더라)에게 직접 찾아간 큰 조카가 닦달해서 근처 CCTV를 다 뒤지고, 오후에는 형제들이 차를 몰고 직접 나가 찾아봤다.

마음 졸이며 근처를 돌아다니다 CCTV에 마지막 잡혔던, 아버님 걸음으로 30여 분 거리의 아파트단지에서 놀이터 의자에 누워계시던 아버님을 큰누님께서 찾내셨다.


그날, 온 가족이 다 모였던 기억이 났다. 어머님께서는 다리가 불편하셔서 꼼짝 못 하고 집에서 누워서 울고 계셨고, 형님댁 둘째 조카며느리가 어머님을 위로하고 있었다.

먼저 집에 도착한 가족들이 준비한 쌀미음을 부모님께 드리고, 탈수 증세로 기운 없어하시던 아버님께서 큰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며 안도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님의 경도치매는 착한 치매라, 이때 딱 한번 가족들의 마음을 애타게 하시고는 홀로 외출을 하신 적 없다.


작년 11월, 어머님께서 갑자기 허리를 삐끗하셔서 거동을 못하셨다. 2주 정도 큰 누님과 작은 고모께서 번갈아가며 돌시다, 두 분 다 어머님을 집에서는 이대로 감당하실 수 없으다고 결론 내리셨다. 단기로 입원하실 수 있는 요양병원을 알아보셨다. 머님과 아버님까지 두 분을 종일 돌볼 간병인도 구하셨다.

큰 누님께서 매일 부모님 병실로 찾아뵈셨다. 거리상 가까이 계시다 보니 어머님께서 더 자주 전화하시고 부르시기도 하셨다. 다른 가족은 지방에 있거나, 작은 아들인 남편과 난, 부모님 댁과 1시간 30여 분 거리에 있어서 주말에 잠깐씩 뵙는 게 다였다.

한 달 여 시간이 흘러 어머님께서는 조금 회복이 되셨다. 여전히 거동은 힘드셨지만 앉으실 수는 있으셨다. 무엇보다 요양병원에 있기 싫어하셔서 집으로 퇴원 돌아오시길 간절히 원하셨다.


어머님께서 퇴원해 나오시기 전 주말 토요일는 우리 가족이 부모님을 만나 뵈었다. 아버님께서는 감기에 걸리셔서 기침을 고 계셨다.

작은 누님의 남편분이신 아주버님과 잠깐 복도를 나가서 걸어 다니신 지 얼마 안 되셨다 들었다. 입원할 당시에는 뛰듯이 걸으시던 아버님께서 조금 걷고는 힘드시다고 바로 병실로 들어오셨단다.

어머님과 입원하신 첫날에는 집으로 돌아가 혼자서라도 어머님을 간병하겠다고 난리를 치셔서 조용히 계시도록 수면제를 처방할 만큼 건강하셨던 아버님이셨다.


한 달 정도를 요양병원에 계신 아버님께서는 많이 쇠약해지신 모습이셨다. 간병인 말씀으로는 우리가 방문한 그날, 식사를 안 하겠다 하셔서 떠먹여 드리니 한 그릇씩 다 드실 만큼 잘 드셨다고 했다. 우리가 오기 얼마 전 식사를 하셨다고 했는데...... 한 번 시작된 아버님 아랫배 쪽 경련이 계속되고 있었다. 토요일 오전, 면회 시간이 끝나가던 터라 딸꾹질처럼 시작된 아버님의 경련에 등을 계속 두드려 드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간간히 쿨럭거리시며 기침을 하시는데, 입 쪽으로 휴지도 대어드리고, 손에 들려드렸지만 뱉어내지 못하셨다. 안광이 흐려진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으셨다.

'가래를 저렇게 못 뱉어내시면 폐렴 오시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아버님,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님의 생기 없으시던 눈동자, 아버님의 끊이지 않는 기침, 딸꾹질과 비슷한 아랫배 경련......

어느 것 하나도 가볍게 볼 수 없었다.


그다음 주 화요일에 어머님께서는 집으로 돌아오셨고, 아버님께서는 열이 오르시며 폐렴 증세가 있으셔서 요양병원에서 퇴원을 못하셨다.

당일 폐렴으로 인한 고열로 근처 다른 큰 병원으로 이송되셨다. 큰 누님께서는 병원 관련을 알아보시고, 혈압이 계속 떨어지는 걸 작은 누님께서 발견하셔서 근처 대학병원을 수소문해 들어가셨다. 급하게 내려진 진단은 장천공이었다. 일단 개복을 해야 어느 부분에서 천공이 있는지 알게 된다고 하셨다.


아버님께서는 의식이 있는 상태로 그 밤 응급수술을 들어가셨다. 큰누님과 작은 누님의 배웅을 받으며 들어가신 아버님께서는 씩씩하게 수술을 받고 나오셨지만, 그 이후 선망과 치매 증상이 심해지셔서 중환자실에 계시던 2주, 일반병동 입원실에서의 10여 일 동안 정신을 놓으셨다.

아버님께서는 "아야!", "엄마는?", "아파!" 이 말씀 외에는 못하시는 시간이 계속되셨다.

일반병실에서 어느 정도 기력이 회복되셨던 하루만 큰 누님 이름을 부르시고, 살고 계신 아파트 이름도 말씀하셨다. 그 외에는 주로 "아야!"라는 비명만 계속 지르셨다.

고령에 폐렴과 장천공으로 인한 수술로 아버님께서는 일상으로 돌아오시지 못했다. 중환자실에서는 고압산소 치료도 받으시고, 연명치료 단계까지 치료받으셨다.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이미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몇 년 전부터 등록해 놓으신 상태였다.

자녀들도 동의를 한다는 전제하에,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 순간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보내시는 것으로 치료 방향이 정해졌다. 막내인 남편은 가족들 모두 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1주일 간 해외출장이 예정되어 있어, 바로 동의하기 힘들어했다. 해외에 있는 동안, 아버님께서 돌아가실까 봐 걱정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길 때 연명치료를 시행할지 여부를 결정해 오라는 담당교수님의 말씀에, 다른 가족들은 다 동의를 했다 하셨다.

매일 아버님 상황을 눈으로 보셨던 큰누님께서 빠르게 결정 못하는 남편 때문에 화를 내셨다. 매일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시는 아버님 모습을 보면서 힘드셨던 마음도 말씀하셨다.

연명치료가 들어가면 심장이 멈출 때까지 인공심폐를 써서라도 생명을 이어간다. 시작되면 본인도, 가족도 고통스러운 희망 없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친정어머니의 연명치료를 먼저 겪어본 난, 남편에게 이야기하고 아버님의 자녀인 남편도 마지막으로 가족들 뜻을 따랐다.


다음 날 새벽부터 출장 떠난 남편 대신 내가 아버님 계신 병원까지 찾아갔다. 오전에 허리 치료를 다녀오고, 은마상가에 들러 죽을 샀었다. 아버님께서 즐겨드시던 팥죽, 열 내리는데 좋다는 녹두죽을...... 장천공 부위가 위라서 드시지도 못하는데 열심히 샀었다. 잠깐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는 발산역까지 전철로 이동했다.

꼬박 1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 아들과 남편이 감기에 걸려 수술 후에는 중환자실에서만 한 번 뵈었던 아버님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종종걸음을 했다.


원으로 가면서 큰누님께 전화를 드리니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 빠르게 병실 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새로 아버님을 전담하게 된 시원시원한 성품의 간병인 분도 뵙고, 큰 누님도 뵐 수 있었다. 큰 누님 따라 의료용품점에서 아버님 간병용 물품 구입하실 때 께 가고, 지하철 1 정거장 거리의 부모님 댁까지 데려다주셔서 어머님 얼굴만 뵙고 나왔다.

2주 동안 집에서 시간을 보내신 어머님의 눈빛은 많이 또렷해져 있으셨다. 간병인께서는 작은 고모의 친구시고 지극정성으로 어머님을 간호하고 계셨다.


* 다음 편에 내용을 이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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