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수 있는 건 손잡아드리기 2
나날이 조금씩이라도 회복되시는 어머님과 달리 아버님께서는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셨다.
장천공 부위도 겉은 아물었지만 속에서부터 제대로 낫지 못해 한번 더 수술부위를 열어서 꿰매셔야 했다. 일반병실에서의 시간도 회복을 위해서보다 최소한의 치료만 이어졌다.
수술 부위는 조금씩 회복되는 듯하셨지만, 위를 봉합하신 거라 콧줄도 위 대신 장으로 우회해서 영양을 공급받으셨다.
일반병실에서 열흘 정도 지내신 후, 불안정한 상태로 혈압이 떨어지고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계속되어 임종실에서 사흘을 보내시기도 했다. 폐렴에 차도가 없으셨고, 그곳에서는 링거로 모르핀이 공급되어 고통은 없으셨다. 임종을 준비하는 공간이라 콧줄로 공급되던 영양도 중단되었다. 편안하게 고통 없이 간간히 숨쉬기 힘들어하시지만 주변에서 들리는 자녀들 목소리에 눈은 못 뜨셔도 반응을 보이셨다.
12월 31일부터 1월 2일까지 계셨던 임종실은 가족들의 방문이 비교적 자유로운 공간이라 아버님 친척분들, 교통이 좀 불편하셔서 서울 오시려면 반나절 걸리는 거리의 아주버님 내외분, 큰 조카가 다녀갈 수 있었다.
어머님께서도 마지막 인사를 위해서 왔다 가셨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를 너무 힘차게 외치셔서 간호사들 보기에 부끄러웠다고 하셨다.
움직임이 많고 아버님 병실에 와서도 소변줄을 뽑으려 했던 아들 때문에, 남편은 수시로 아버님 병실을 나갔다 들어왔다. 낮과 밤 시간을 지켰던 형제들은 형님, 큰 누님, 작은 누님이셨고, 더 이상 할 일이 없으시다고 간병인 분은 댁으로 가셨다.
1월 3일 오전에 다시 일반병실로 옮겨지신 후에는 간병인 분도 다시 오셨다. 1월 5일 한번 더 혈압이 떨어지셔서 병원 호출로 낮에는 큰누님께서 계시고, 밤은 남편의 형님이신 아주버님께서 지키셨다. 자녀들이 오고 가신 후에는 조금씩 혈압이나 산소포화도가 안정되셔서 임종이 가까워지면 전화를 주시기로 하셨다.
1월 5일 밤에는 시댁 카톡방을 계속 확인하고 있었다. 1월 6일로 넘어가고 얼마 있지 않아, 아주버님께서 아버님 혈압이 갑자기 많이 떨어지셨다고 하셨다. 그리고 11분 정도 지났을까 밤 01시 01분에 의사의 사망진단 소식을 올리셨다. 아버님께서는 매일 자주 곁을 지키던 큰누님 대신 자주 뵙지 못하시던 아주버님을 내내 기다리셨던 것처럼 그렇게 함께 있다 떠나셨다.
내가 알던 심장박동이 멈춘 뒤 2~3시간은 지속되는 심실세동도 없이 사망진단이 바로 나셨다. 끝까지 힘드셨지만 자가호흡을 하셨고, 그 숨을 거두시며 심장도 함께 떨림 없이 멈추셨다.
그렇게 며칠 동안 서서히, 마지막은 급하게 아버님께서는 소천하셨다.
12월 31일부터 2026년 1월 1일 새해 첫날, 다음날인 2일 금요일, 주말인 1월 3일과 4일, 매일 서울 강남구 끄트머리에서 강서구 발산역과 부모님 댁까지 오고 가던 그때가 조금 힘들긴 했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아버님을 뵙고 손잡아 드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지막까지 힘을 다해 버텨주셔서 연초도 비껴가고, 첫 주말도 지난 후, 남편 직장 시업식도 마치고 아버님을 보내드릴 수 있었다.
아버님 임종을 기다리며, 어머님의 강한 의지로, 장애가 있는 우리 아들의 머리카락을 품에 넣어 보내드리자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며칠 전부터 준비를 했다. 종이접기를 예쁘게 하는 조카 한 명에게 부탁해 접은 하얀 종이봉투에, 편지지 접듯 종이를 접어 아들의 귀밑머리를 넣어드리며 작별인사 했다.
소천하신 새벽부터 꽉 찬 2박 3일의 장례 일정동안 각자 연고가 서울에도 있어서, 아주버님께서만 빈소에 딸린 침실에서 주무셨다. 장례 2일 차에는 작은 누님의 제안에 따라 남편, 나, 형님댁 둘째 조카, 작은 누님 가족들까지 MT 하듯 장례식장에서 짧은 3~4시간을 자고 마지막날 아침 이른 시간에 발인예배를 드렸다.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을 모시고, 용인수목장에서 푸르름 가득한 예쁜 소나무 아래, 흙과 함께 아버님을 자연으로 보내드렸다.
수목장까지 끝내고 홀로 간병인과 계신 어머님께 인사드리려고 장례버스로 병원까지 함께 왔다.
각자 자동차로 병원 가까이에 있는 부모님 댁으로 와서 입관식 때처럼, 각자 아버님 추모하는 말씀을 한 마디씩 나눴다.
각자 다정하셨던 생전의 아버님을 회고하셨고, 별 말이 없는 남편 대신 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들이 강남장애인지원센터 긴급 돌봄으로 활동지원사와 함께 있어서 참여 못한 아쉬움과 아들을 낳고 산후조리를 시댁에서 하던 에피소드를 말했다.
같은 아파트 주민이시다 주변의 권유로 경비원 겸 관리소장, 소방관리 업무까지 맡으시던 아버님께서는 하루 3끼를 작은 며느리와 함께 드셨고, 설거지는 꼭 본인이 하신 후 관리실로 내려가곤 하셨다. 손주랑 어설픈 새내기 애기엄마가 걱정되셔서 30분, 1시간 간격으로 3층인 집으로 뛰어올라오셨던 기억이 많이 났다.
스물네 해나 지난 이야기지만, 시댁에서 지냈던 한 달 여 동안, 낮동안 종일 아들과 함께 있던 때, 아버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참 힘들었을 시간이었다. 남편이 화곡동에서 안양까지 출퇴근하던 시기였다. 며느리 산후조리로 사흘을 집에만 계셨던 어머니께서는 1주일 후부터는 낮시간에는 집 바깥에서 지내다 들어오셨다. 활동적이셔서 집에 있기 힘들어하셔서 원래 생활하시던 습관대로, 산후조리 관련된 음식, 빨래, 청소를 아침에 끝내시고 오전 8시가 지나면 외출하셔서 오후 5시쯤 들어오셨다. 아버님의 돌봄을 더 많이 받던 한 달 여 기간이었다.
금전적인 부분에 의미를 많이 두시던 어머님과 달리 아버님께서는 대가를 바라지 않으시고 미숙한 작은 며느리를 사랑해 주셨던 기억과 추억이 많았다.
산후조리를 시댁에서 했다 그러면 요즘 사람들이면 다 기함할 일이긴 하다. 사실 긴 세월 동안 후회했던 일이기도 했다. 어머님께서는 며느리랑 함께 있는 시간이 불편하신지 최소한의 시간만을 효율적으로 쓰셨고, 아버님께서는 여름철이라 저녁이면 모기 잡는 것까지 신경 쓰시고 매일의 손주 목욕에도 함께 해주셨다.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혼자서 아들 목욕이 가능할 때도 따뜻한 물 받고 버리는 건 꼭 아버님 손으로 하셨다.
아버님께서 매 순간 신경 써주셨던 부분이 장례를 마친 지 열흘 정도 지난 오늘까지도 떠오른다.
막내아들의 하나뿐인 자녀인 손주를 마음으로 많이 애달파하셨던 우리 아버님, 입관할 때 편찮으셨던 몸으로 생을 마치셔서 홀가분하게 육신마저 보내드리고 싶었던 마음이었는데 아들의 장애까지 들고 가시게 가슴 한켠에 올려드려야 했을 때, 마음이 시리고 아팠다.
혼자된 여생을 보내실 어머님의 소원이셔서 그리 했지만, 아버님 사랑과 안쓰러움을 생전에도 많이 받았던 작은 며느리라 죄송한 마음은 세월 속에 묻어두며 살아가야겠다. 아버님께 아들 잘 키우고, 남편 사랑하며 살아가겠다는 약속을 꼭 지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