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슬붕이 Apr 10. 2024

층마

이름 없는 마기였던 내가 둥지 튼 곳-1

하늘이 맑고 푸른 날 겨울 동안 앙상하던 가지 끝에 새순 돋아나던 어느 날에 그 일이 생겼던가?

겨울 내내 무덤 가 눈 덮인 산속을 어슬렁거리거나 어스름한 동굴에서 겨울잠이나 자며 심심해하던 계집아이가 이르게 핀 진달래꽃이나 뜯어먹던 때였어.


멀리서 자주 못 보던 말발굽 소리와 초라한 작은 말이 끄는 수레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들었다지. 간간이 들려오는 사람 소리에 호기심이 동하고 놀라게 해 줄 마음으로 길을 막아섰다지.

우리 마기들한테 발이 들려있으니 말보다 빠르게 산길을 달려 앞질러갔어. 피할 곳도 없는 좁은 길이고 험한 산세라 수레고 말이고 내팽개치고 도망가야 할 곳에서 딱 나타난 거야.

 "크 아아앙~ 크어크어."

이 산에 호랑이는 없어도 내가 있어. 울부짖는 계집아이 목소리에 우리들의 갈라진 쇳소리까지 보태자 큰 말은 놀라 태우던 남자를 떨어뜨리고 수레를 끌던 작은 말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흔들어대었지.

행색이 어디서 온 건지 아리송한 우리네 복색이 아닌 수상한 자 하나와 어린 사내아이가 보이네.

말에서 떨어진 남자는 잠시동안 엎어져 있다 일어나 사내아이를 챙기더니 앞에 있던 계집아이를 보자 눈을 크게 떴어.

사나운 눈매에 안광이 번득이고 입가에는 섬뜩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계집아이는 남자를 보며 달려들었어. 수상한 남자는 수레 쪽에 일행인 아이를 빠르게 내려놓고 딱딱한 막대기로 계집아이를 막아섰다지.

 "크아아! 왜 도망가지 않느냐!"

오랜만에 인간의 말을 내뱉는 계집아이의 험한 숨결과 우리의 기세에도 눌리지 않는 인간은 처음이었어.

큰 몸집에 오랫동안 산길을 달려온 건지 남루하지만 튼튼해 보이는 가죽으로 만든 상의를 입은 남자는 강한 눈빛과 힘으로 계집아이의 손톱과 손아귀힘을 막아내었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뻗으면 놈의 목덜미를 물어 피맛을 즐길 수 있으리라 느꼈던 우리네 기대와는 달리 남자도 만만치 않았어. 마기에게도 눌리지 않는 사람의 힘이라니... 생소한 느낌의 검은 기운과 우리네와 다른 혈향이 도는 알싸함은 마기들조차 꺾기 힘든 무언가였지.

한참 대치하던 둘은 남자가 힘으로 버티던 막대가 앗! 하는 사이 계집아이를 밀어내고 어깨와 등짝을 내리치면서 잠시 떨어졌어.

남자가 든 막대를 자세히 보니 십자가 모양과 그 위에 혀를 날름거리는 뱀이 그려져 있는 문양이 있었어. 그리고 십자가 뒤에 서양 것으로 보이는 방패모양까지 작게 새겨져 있는 게 뜻은 몰라도 서양 부적인 듯 보였지.

 "헉... 헉... 너는 누구?"

 "크아앙! 나는 군대다."

 "너랑 같이 있는 것들은 무엇이냐?"

 "내 아비와 어미, 이 산에 깃든 것들이지. 여기서 죽은 이들이 내 가족이고 이웃이다."

 오랜만의 인간 말에도 계집아이는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어. 누군가 물어주길 바란 것처럼, 오래 기억하려고 매일 읊조린 것처럼.

 마기들과 살면서 혼자 중얼거리고 소리 지르며 우리들의 웅성거림에 대답하던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어.

 수상한 행색의 남자는 계집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손등을 물어뜯어 잠깐 피맛에 웃음 짓던 우리는 잠시 후 먹은 피를 토해내는 계집아이를 볼 수 있었어.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의 피에 죽음의 기운이 가득 차 있을 수 있지?  

 그 덕분에 계집아이와 함께 있던 마기 여럿이 떨어져 나가고 이름 없는 나만 겨우 계집아이 속에 남았어.

 "내 피를 맛본 너! 잘못했다. 이래 봬도 주교께     

축성받은 몸이란다."

 "호랑말코 같은 양놈이!"

 남자의 주변에 일렁이는 검은 기운은 꺾이지 않고 우리네 마기는 계집아이 몸으로 들어가지도 주변을 벗어나지도 못한 채 구경만 하고 있었어.

 겨우 남은 나까지 쫓겨날까 봐 목소리를 내지 않고 깊숙이 계집아이 기억 저편으로 달려서 숨었어.

 한번 더 힘을 가다듬은 계집아이는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우리네 힘이 빠진 인간의 몸으로 상대가 될 리 없었어. 옆에 있던 바위에 턱 몸이  부딪힌 계집아이는 정신을 잃었다지.


 잠시 툭툭 목이 긴 가죽신을 신은 발끝으로 계집아이를 건드려 보던 남자는 어디를 잡을지 망설이다 허리 쪽을 잡고서 짐짝을 옮기 듯 어깨에 걸치고 수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어린 사내 곁으로 갔어.


 그때까지 상황을 살피던 사내아이는 남자의 짐 가방을 가지고 나왔어. 수레 위에 잠시 계집아이를 내려놓은 남자는 사내아이의 도움을 받아 피가 흐르는 손에 물을 부어 씻고는 약초 다린 끈적한 것을 올려 치료했어. 옆에서 돕는 사내아이도 자주 해 본 솜씨인지 빠르게 천을 감아주는 것이 손발이 척척 맞았어.

 계집아이는 쉽사리 눈을 뜨지 못해 도망도 못 가고 주변을 살피는 우리 마기들과 인사 나누지 못한 채, 수레에 실려 먼 길을 떠났어. 나만 계집아이에게 남아서 이 순간을 기억하고 떠나야 하다니...

 그때부터 외톨이 마기의 삶이 시작되었어.





작가의 이전글 층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