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슬붕이 Apr 10. 2024

층마

이름 없는 마기였던 내가 둥지 튼 곳

이름 없이 군대라 불리던 시절 이야기나 들려줄게.


동네에 전란에 조실부모한 여자 아이가 하나 있었어. 얼굴은 예쁘장한데 부모가 어린 여식 하나 살리려고 도망가다 아비는 왜놈 칼에 맞아 죽고 어미는 이 놈 저놈한테 잡혀 돌림 당하고 죽기 직전 여식 얼굴 한번 더 보려고 도망쳐 숨어있던 여식 앞에서 비참하게 죽었다지.


전란 끝무렵이라 피맛도 잊힐 무렵 워낙 사람 발길 안 닿는 곳이라 땅에 스며든 피에 여럿 모여 허기 달래다 보니 계집아이 하나가 있으니 여럿 마기가 둘러쌌다지. 계집아이는 말도 못 하는 슬픔에 눈이 떠지지 않을 만큼 부푼 눈과 울어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목소리에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마기들을 향해 염원을 쏟아내었어.


더 이상 죽은 아비어미처럼 허망하게 가기 싫다. 아비어미 죽인 놈들의 복수가 하고 싶다. 혼자 배고픔과 어두움에 버려지기 싫다.


계집아이의 염원에 근처 마기들이 하나 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어. 마기들도 똑같이 원한 없는 존재가 없었거든. 짐승의 원한이든 인간의 원한이든 산과 골짜기, 나무와 돌의 원한이든 우리는 그런 존재들이니까.


여럿 모인 마기들이 힘을 합쳐 회오리쳐 계집아이 몸속에 깃들었어. 이제 외로울 일 없고 마기들 덕분에 배고프지도 무서워할 것도 없지. 게다가 힘은 장사에 웬만큼 간 작은 짐승이건 사람이건 눈길 한 번에 심장이 졸아서 쓰러지기 일쑤였어.

까르르 입꼬리가 찢어대게 웃어대는 계집아이 웃음소리가 산을 울리곤 했지.


여럿 마기와 사는 계집아이는 부모 시신을 수습한다고 우리 힘으로 무덤을 만들고 그 가운데 살았다지. 옷은 어릴 때 입던 옷 그대로라 너덜하고 씻지 못해 너덜거렸지만 지나가던 사람들이 가진 거 다 버려두고 도망가니 신경 쓸 일 없어 좋았다지. 근처에 장례가 있거나 산당에 가끔 찾아오는 무당이 놓고 가는 귀신밥을 먹기도 하고 산짐승을 잡아먹기도 하면서 사람 계집아이는 우리 마기들이랑 살았어. 웬 이상한 푸른 눈의 코쟁이를 만나기 전까지 말이야.

작가의 이전글 사는 게 고통이라는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