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착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내가 정말 착한 걸까?라는 고민을 항상 하고 있다.
착하다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
희생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리다. 또는 그것을 빼앗기다.
요새 사회에서는 착하다를 희생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 같다. 자신보다 남을 위할 때 우리는 착하다고 말한다. 배려와 희생은 다른데 말이다. 착하다의 뜻이 변질되기 시작하자 반감을 가지며 자신의 이익추구에만 몰두하는 것이 심해지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적당한 선(나를 희생할 정도가 아닌)에서 타인을 돕는 건 나에게도 큰 도움으로 돌아올 것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정말 착한 것이 맞을까에 대한 고민에 가설 하나를 세웠다. 재난상황에서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부축하면서 같이 도망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은 아니오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희생적인 면을 고민한 것이니 다른 가설을 또 세웠다. 그럼 재난상황에서 나는 결국 살았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친절할 수 있을까? 내 것을 나누고 배려하고 양보할 수 있을까? 대답은 역시 모르겠다이다. 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대중교통 노약자석에 앉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몸이 불편하거나 노인분들이 있으면 당연히 자리를 양보하고 싶다. (하지만 용기가 없어서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 상황이 여유로우니까 약자에게 양보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먼 나도 여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양보와 배려를 할 수 있을까? 아무리 고민해 봐도 역시 잘 모르겠다. 자신이 없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나는 착한 인간이기보다는 양심적인 인간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도덕적 의식에 대해 고민하고 가설일 뿐이지만 죄책감을 느끼며, 더 나은 행동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에 대해 양심적이다라고 생각했다. 양심이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적 의식이니까.
수능 탐구과목으로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을 공부했었다. —여담으로… 나는 윤사를 정말 좋아해서 윤사만 팠지만 결국 수능에서는 수능 3일 전 친구에게 잠깐 배웠던 생윤 등급이 더 잘 나왔다. 미술 입시에 그림으로는 다 떨어졌지만 생윤 덕분에 성적으로 전문대학이라도 갈 수 있었다. 인생이란 정말 모른다.— 맹자, 성선설, 인의예지 이 세단어는 윤리를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디선가 들어봤을 것이다.
맹자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하는 학자이다. 성선설을 뒷받침하는 근거에는 인의예지가 있다.
우리는 우물에 빠진 아이를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며 구하려 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측은지심이다. 그러한 이유는 본능적으로 선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수오지심이란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악행에 분노를 느끼는 것. 사양지심이란 겸손하고 타인을 존중하고 양보하는 마음이며 시비지심은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것이 맹자가 주장한 인간의 타고난 4가지 본성이다. 내가 위에 설명한 재난상황의 가설에도 인의예지가 다 들어가 있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안타까워 도와드리고 싶다. (측은지심) 하지만 나도 살고 싶기에 그럴 용기가 없다. 거기에 오는 부끄러움. (수오지심) 그렇다면 존중하고 양보하는 마음이라도 갖고 싶다.(있을까? 지만)(사양지심) 도덕적 문답을 하며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고민함.(시비지심)
나는 불안도가 높고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극단적인 상황을 많이 상상한다. 재난상황의 가설 또한 거기서 비롯됐다고 상각한다. 나는 상황을 상상한 것이지만 실제 상황이 왔을 때 다른 사람들 또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할 거라고 믿는다. 최종 선택은 다를지언정.
우리는 자신보다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확장시킬 수 있다. 나는 사람이 날 때부터 선한가라고 물으면 아니오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악한가?라는 이분법적인 질문을 받는다면 그것도 아니오이다.
각자의 성향과 기질이 다른데 어떻게 두 개로만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 같은 경우는 인간은 본성이 악하게 태어났으니 규범과 교육, 예절로 인위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한다. 순자는 사람은 악하게 태어났으나 충분히 교육을 통해 교화가 가능하다는 주장이고, 맹자는 사람은 선하게 태어났으니 그것을 교육을 통해 좀 더 깨우치게 하자라는 주장이다.
성선설과 성악설 무조건 하나만 지지할 수 있다면 나는 성선설을 주장해 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나의 이익을 더 취하고 싶어서인지 이제는 성악설에 더 비중을 싣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 악하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악하다기보다는 타인보다 자신을 좀 더 위한다. 그것은 악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몸속 장기들은 타인이 아닌 자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일을 하고 있는데 당연한 것 아닌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배려를 배우고 양보를 배우며 사랑을 배운다. 우리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타주의를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다. 나는 이기적인 사람들을 많이 봤다. 나또한 이기적인 면모가 많지만 이타주의를 배척하진 않는다. 그들은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주는 법을 몰라서 자신밖에 모른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져있지만 평생 아무도, 자기 자신조차도 사랑하지 못한 채 남은 생을 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깨우치지 말고 평생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문명의 시작은 ’ 부러졌다 붙은 흔적이 있는 다리뼈‘라고 말했다. 옛날에는 다리가 부러졌다면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없어 금방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리뼈가 다시 붙은 흔적이란 곁에서 누가 도와줬음을 나타낸다. 누군가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 사람을 돕는 것. 그것이 문명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착하게 살자.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게 살자는 뜻이다.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