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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Feb 12. 2023

<배드 배치-버려진 자들의 땅>

인간성의 회복이 중요하긴 한데...

황량한 사막을 떠도는 젊은 여자. 여자가 지나온 길 위에도, 나아갈 곳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모래먼지와 살을 태울 기세로 내리쬐는 햇빛만 가득할 뿐이다. 정처 없이 걸어보지만 여전히 이 잔혹한 대지는 무엇도 내주지 않는다. 그때, 눈앞에 차가 한대 보인다. 혹시나 시동이 걸릴까 싶어 달려가보지만 역시나 이미 수명을 다했다. 짜증을 내지만 바뀔 건 없기에 화장이나 고쳐본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과거를 떠올리지만 분위기가 이상하다. 저 멀리서 인위적인 모래먼지가 불어온다. 백미러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골프카트 같은 것을 타고 누군가 달려오고 있다. 이 잔인하고 무도한 세계에서 만남이란 반갑기는커녕 다가오는 고통과 죽음을 상징한다. 필사의 기세로 달려보지만 카트는 점점 다가오고 여자는 곧 붙잡히고 만다.


정신이 든다. 혹시나 이 모든 게 지독한 악몽이 아닐까, 깨어나면 가족과 애인이 악몽을 꾼 그녀를 비웃으며 맞이해 주는 것은 아닐까. 일말의 기대를 하며 눈을 뜨지만 다가오는 것은 흉악한 식인종. 그들은 인간세계의 윤리관 따위 시원하게 내다 버린 듯 여자에게 주사를 놓고 팔과 다리를 잘라 그녀가 보는 앞에서 구워 먹는다. 약에 취해 고통이 느껴지지 않고 사리 분간이 잘 되지 않는다. 식인종이 그녀를 위해 약을 주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보관이 용이한 식량 자원이 되고 살아있는 상태로 먹어야 육질이 연하기 때문이리라. 여자, 알린은 이내 기절한다. 이 버려진 자들의 땅에서 배드 배치들을 마주한 것이 꿈이길 바며.

알린은 식인종에게 잡혔지만 가까스로 탈출한다. 고어한 연출이 불편하다.
줄거리 및 설정


영화 <배드배치-버려진 자들의 땅>은 범죄를 저질러 추방된 배드 배치들이 황량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갈취하고 기만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 알린은 20대로 추정되는 젊은 여자로 모종의 이유로 이곳에 수감된다. 알린은 식인종과 조우하지만 필사의 의지로 탈출해 '스캐빈져'의 도움을 받아 '안식처'에 도달한다. '안식처'는 마치 인간 세계를 축소시켜 놓은 듯, 이 지옥 같은 황무지에서 나름의 규칙을 따르며 온화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물론 마약 중독자, 매춘업자, 식인종에게 수족을 잃은 사람들이 널려있지만 말이다.

식인종은 인육을 통해 단백질을 섭취해 근육질의 거대한 몸을 유지한다. 설정이 참 그로테스크 하다.

'안식처'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식인종들은 황무지에 낙오된 사람들을 사냥하고 약탈하며 살아간다. 식인종에서 한가닥 하는 것으로 보이는 '마이애미 맨'은 타투이스트 출신의 이민자로 배드배치가 되었지만 나름의 어긋난 윤리의식을 가진 인물이다.  비록 사람을 사냥해 인육을 먹지만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딸은 목숨을 버려가면서라도 지키겠다는 뒤틀린 부성애를 보여주는 '마이애미 맨'은 바로 이 딸 때문에 알린과 조우하게 된다.

알린과 마이애미 맨의 불편한 동행

너무나 강한 자극에 노출되어서인지, 아니면 이곳에 오면서 삶의 목적과 의지를 상실해서인지 알린은 홀린 듯 '안식처' 밖으로 나가려 한다. 그날도 '안식처' 밖으로 나간 알린은 쓰레기를 뒤지다 다리가 부러진 식인종을 만나게 된다. 총으로 그녀를 쏴버린 알린은 식인종과 함께 온 아이, 마이애미 맨의 딸을 두고 갈 수 없어 함께 안식처로 돌아간다. 어쩐 일인지 아이는 말을 하지 않는다. 못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알린은 그녀를 길들이기 위해 그리고 호감을 얻기 위해 토끼를 사준다.


마이애미 맨은 딸을 찾아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나선다. 그러던 중 '스캐빈져', 알린을 도와준 그 인물을 만나 초상화를 그려주고 정보를 얻는다. 안식처로 목적지를 정한 그는 곧장 달려가지만 경계가 삼엄한 그곳을 아무리 마이애미 맨이라고 하더라도 단신으로 잠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변을 맴돌던 중 그는 의족 때문에 불편한 걸음으로 비틀거리며 사막을 휘젓는 알린을 마주한다. 알린은 마약에 취해있었다. 사실 '안식처'는 수장인 '드림'에 의해 유지되는 지역이었는데, '드림'은 마약이 묻은 종이를 바탕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호화롭게 사는 인물이었다. 파티에서 마약에 취한 알린은 관성에 따라 황무지로 나왔지만 마이애미 맨에게 붙잡히고 만다.

마약왕 '드림'과 그의 아내들이자 경호원들

눈을 뜬 알린에게 들이밀어지는 한 소녀의 초상화. 소녀는 알린이 데려온 아이였다. 대충 '안식처'를 찾아보겠다며 둘러댄 알린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둘의 기묘한 첫 동행이 시작된다. 알린은 그와 동행에서 불편하면서도 독특한 유대감을 느끼게 되는데, 위기를 함께 타파하며 비록 마이애미 맨이 식인종이지만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의 동행은 보기 드문 선한 자의 도움으로 끝이 난다. 식인종인 마이애미 맨을 습격하고 오토바이를 탈취해 알린을 데리고 안식처로 돌아간 것이다. 알린은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 주저하지만 결국 '안식처'로 돌아간다.


죽기 직전의 마이애미 맨은 필사의 의지로 길을 걷는다. 그러다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다시 한번 '스케빈져'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의 도움으로 살아난 그는 알 수 없는 심경의 변화를 경험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한편, 알린은 '안식처'에서 소녀를 수소문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 '드림'의 경호원들 사이에 수줍게 고개를 드러낸 아이가 보인다. 경호원이라고 하지만 그녀들은 '드림'의 아내들로 대부분 임신한 상태에 총을 메고 있을 뿐이었다. 다짜고짜 '드림'의 저택으로 향한 알린은 '드림'의 환대를 받으며 그 실체를 마주한다. '드림'은 이곳에 마약 공장을 세워 황무지 밖으로 공급하며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었다. '드림'은 그녀에게 자신과 함께 편하게 살자고 유혹하지만 알린은 만삭의 여인을 인질 삼아 빠져나간다.


소녀의 마음은 알 수 없었으나 소녀 또한 알린을 따라간다. 토끼를 잘 부탁한다는 '드림'의 말을 뒤로한 채 황무지로 나간 소녀와 알린은 곧 마이애미 맨을 마주한다. 그들은 토끼를 잘 돌봐달라는 '드림'의 말을 보기 좋게 거역하고 잡아먹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나름의 해석


영화를 보는 내내 불쾌한 감정을 지울 수 없다. 15세 관람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어한 장면이 자주 등장하고 설정 또한 그로테스크해 보고 난 후에도 입맛이 쓰다. 하지만 장면과 설정의 충격적인 부분을 걷어내고 나면 감독이 의도한 부분이 보인다. 우선 영화는 명백한 대립구도를 보여준다.


배드배치-인간세계

식인종-'안식처'


이런 식으로 말이다.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드림'측 인물은 사지가 멀쩡하고 하얀 옷을 입는다. 이는 그들이 무결성을 상징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반면 배드배치의 몽환적이고 삭막한 분위기와 더불어 그곳에 폭력적인 본성을 그대로 노출시키며 살아가는 식인종은 가시회 된 지옥을 보여준다고 추측할 수 있다. 우스운 점은 식인종이나 '안식처'의 주민들이나 같은 배드 배치라는 것이다. 또한 극 중 배드배치들이 이곳에 수감된 이야기를 들어보며 밀입국, 경범죄 등으로 인간성을 말살당할 정도로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경우가 많이 없다. 만일 있다고 하더라도 왜 굳이 이러한 형태의 감옥을 만들어 위험성을 감수하는 것인가? 아마 감독의 의도는 문명을 누리며 인간답게 산다고 믿지만 인간 세계에 사는 자들도 본질은 브리지 시티의 식인종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인간 세계의 누군가도 식인종처럼 누군가를 약탈하고 강제하고 착취하는 행위를 보이지 않는가.


이는 '드림'이 등장하며 명확해진다. 배드배치이지만 인간 세계의 대부분보다 호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그는 행복과 희망의 본질을 더럽힌다. 그가 보여주는 꿈이란 허상이고 마약이다. 마약의 이름이자 인간화한 '드림'은 물질화된 꿈을 좇아도 실상은 별거 없다는 허무주의와 이로부터 비롯된 폭력을 상징한다. 소녀는 이러한 '드림'의 저택에 살며 생전 누려본 적 없는 안식을 맛본다. 그럼에도 아이가 알린을 거부감 없이 따라간 것은 마이애미 맨의 부성애가 상징하는 비물질적인 순수한 가치를 지향해야 함을 나타낸다. 극 중 소녀로 대표되는 순수함, 문명에 물들지 않은 자연 그 자체의 인간이 바라보기에 꿈, 현실 등 물질세계에 기반한 모든 것들이 추악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주인공 알린은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이다. 현실과 이상(꿈) 그리고 가시화된 지옥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어찌 보면 지극히 인간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배드배치에 들어오기 전에는 생각 없이 살았지만 이곳에 들어와 많은 사건을 겪으며 인간적으로 성숙해짐을 보여준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녀의 육신이 불완전해지고 상처입을 때마다 더욱 단단해지고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인식하는 인간상과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처음 마이애미 맨과 조우했을 때 그녀는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가 지구에서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만났는데, 인간을 두려워하다니"


라며 인간이란 서로에게 의지하는 게 기본이라는 법제와 상식을 벗어나지 못한 알린의 생각을 보여준다. 순수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상황과 다음 이어지는 마이애미 맨의 말,


"너는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네 시선은 너에게 갇혀 있군."


을 통해 세상을 자신의 기준과 편견으로 바라보며 타인에게 의존하려는 성향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처음에는 마약의 힘으로 안식처를 나왔던 것과 다르게 알린은 이후 각성하여 본인의 의지로 문명과 안락한 삶을 걷어찬 채 황무지로 걸어간다. 마약과 식인 두 가지 선택지를 벗어나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떠돌며 인간 본연의 가치를 따르며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마이애미 맨은 알린과 더불어 가장 크게 변화한 인물이다. 인간의 윤리를 저버린 듯 죄책감 없이 식인을 저지르며 무도한 모습으로 등장한 그는 딸을 찾는 여정을 통해 가장 밑바닥의 어두운 구석에서 가시금 인간으로 회복하려는 의지를 상징한다.


알린은 '드림'을 만나 선택을 강요받는다. 딸을 마이애미 맨에게 돌려주며 안식이라는 이름의 현실을 포기하고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가, 아니면 안식을 선택해 현실과의 끈을 놓지 않고 추악하게 살아가는가. 자연 상태는 분명 험난하고 위험하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적인 가지, 가족애, 관계, 자아 확립 등을 이룰 수 있다. 반면 안식을 선택하면 안전하지만 현실의 노예가 되어 배부른 돼지가 되어 살아간다. 떠나는 알린과 소녀를 바라보며 부럽다는 듯 쳐다보는 인질이 된 여자의 모습은 감독이 지향하는 바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극의 마지막에 마이애미 맨과 알린, 소녀가 토끼를 구워 먹는 것은 극의 초반에 마이애미 맨이 식인종으로서 자아를 버리지 않았던 시절 이를 거부하며 집으로 들어가던 소녀의 모습과 대비를 이룬다. 또한 소녀는 사실 말을 할 수 있었는데, 보통의 아이들이 자신이 편하게 생각하는 대상과 장소에서 주로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안식처'도 식인종과의 생활도 아닌 마이애미 맨과 알린과 함께하는 곳이 순수함을 꽃피울 수 있는 새로운 터전이 되어줄 수 있지 않나 싶다. 소녀는 비록 소중한 토끼를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울기는 하지만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는다. 이를 바라보는 마이애미 맨의 모습은 식인종으로서 삶과의 이별이자 새로운 삶을 약속하는 일종의 의식이다. 또한 소녀와 알린이 토끼를 잘 돌봐달라는 '드림'의 말을 거역하고 잡아먹는 것으로 이들이 '드림'의 세계에 삼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이애미 맨, 알린, 소녀를 이어주는 매개체는 '스케빈져'이다. 그는 생과 사를 이어주는 길이다. 돈을 태우며 피어난 불에서 안도감을 얻는 것으로 보아 그는 금전적 가치에서 벗어나 살아있음 자체를 지상의 가치로 삼는 아주 독특한 인물이다.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죽어가는 자들을 살려주며 사막을 묵묵히 횡단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를 떠오르게 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물질적 가치를 지닌 재화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와 생명 그 자체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캐릭터인 '스케빈저'

이렇듯 영화에서는 수많은 상징이 등장한다. 이외에도 음악이 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마 알린의 심정과 관련된 듯한데 식인종과 조우했을 때는 늘어진 듯한 테이프가 재생되는 소리, '드림'의 마약을 섭취했을 때는 몽환적이지만 불쾌한 음악 등으로 극의 분위기를 환기한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경고문은 배드배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듯하다.

'수감자와 눈을 맞추지 마십시오'

그러나 영화를 모두 보고 나면 수감자들 또한 인간이고 그들에게 눈을 맞추면 인간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인간성의 회복과 탈물질적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한줄평- 홉스가 지하에서 오열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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