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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Feb 10. 2023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관계가 절정에 이르면 우리는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거세게 타오르던 불이 연소하여 잔불만이 미약한 온기를 간직할 때 다가오는 서늘한 직감은 빗겨나가지 않는다. 아닐 거라며 연료를 집어넣지만 이미 힘을 잃어버린 불씨는 매캐한 연기를 남기며 사그라들고 불꽃은 어느새 그 붉은빛을 감추고 차갑게 식어버린 잿더미만 남는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끝났다는 것을 실감한다. 더 천천히 불을 지폈어야 했나, 연료를 더 부어야 했나, 정성을 다해 돌봤어야 하나, 미련이 남아 스스로를 자책하지만 애써 밀어낸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어오는 것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지만 경험이 남는다. 어떻게 하면 불을 더 오래 유지할 수 있는지, 타이밍 좋게 살릴 수 있는지, 이전보다 불을 더 사랑할 수 있다. 또 데워진 몸은 쉽게 식지 않는다. 다시 불을 피울 용기를 주고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하지만 그 과정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불이 얼마나 거세게 타올랐는지,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래서 얼마나 많은 재와 미련이 남아 잔해를 뒤적이게 되는지도.

<어쩌면 우린 헤어졌는지 모른다>는 오래된 연인의 결말부터 시작하여 감정이 사그라드는 과정을 그린다. 아영(정은채)은 화가의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자친구 준호(이동휘)를 지원하기 위해 부동산 중개업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이런 아영의 희생을 담보 삼아 준호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지만 계속 낙방한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허세를 부리며 아영을 곤란하게 하는 모습으로 보아 어찌 보면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럼에도 준호는 철없이 행동하며 아영의 기대와 아픔을 모른 척한다. 아영과 준호는 익숙함이 주는 기만에 서로에게 대못을 박고 결국 라면을 두고 벌어지는 사소한 다툼에 둘 사이의 관계가 끝이 난다. 둘은 서로를 떠나 새로운 시작을 한다. 아영은 준호와 모든 면에서 반대되는 인물을 만나고 준호는 생기 넘치는 대학생과 연애를 시작한다. 그들의 새로운 인연이 역설적으로 미련을 상징한다. 결국 극의 마지막에 여전히 미련을 해소하지 못한 채 영화는 끝이 난다.

아영과 준호는 서로에게 아쉬웠던 점을 충족시켜줄 만남을 가진다. 하지만 이 또한 신통치 않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btn 뉴스

영화는 잔불부터 시작한다. 이미 꺼져감이 눈에 보이는 둘의 관계는 곧 사그라들어 연기만이 가득하다. 사실 로맨스물에서 관객이 인물에 몰입하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것은 현실적인 설정이라기보다 사랑의 과정을 함께 따라가며 그들과 래포를 형성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 이미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린 둘의 이야기를 영화의 시작점으로 삼은 것은 오히려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미련이라는 하나의 소재로 서로의 감정을 외면한 채 진행되는 극은 관객을 지치게 하여 중요한 분기점인 각자가 잔여감정을 깨닫는 순간을 퇴색시킨다. 둘 사이의 부족한 정보와 비어버린 감정을 상상으로 채우기 위해 관객이 많은 시간을 소비한 나머지 지쳐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이야기로서 하나의 완결성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설정이라 사정을 유추하기 쉬웠고 이동휘 배우와 정은채 배우의 연기가 매끄러웠기 때문이다.


관계의 끈이 끊어지기 직전의 연인을 보는 것은 관객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서로에게 날이 선 말과 행동을 쏟아내는 인물들과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이 필요 이상으로 들어가 보는 내내 답답해지는 것이다. 더구나 현실적이고 클리셰적인 설정과 전개 때문에 매 순간 결말을 유추할 수 있어 긴장이 사그라든다. 이로 인해 관객의 역할이 그저 관찰자로 한정되어 극의 그 누구에게도 몰입할 마음이 들지 않게 된다. 결국  결말을 알고 보는 부담스러운 이야기는 둘의 마음에 남은 지루한 미련만큼이나 극을 지지부진하게 만든다. 다만 이동휘 배우의 코믹한 연기가 분위기를 환기해 줄 뿐이다.


사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영화의 첫 씬만 봐도 알게 된다. 그들은 헤어질 것이고 헤어졌으며 미련이 남을 거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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