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퇴근 후에 운동을 합니다.(10)]
할 수 없는 날
도저히 일도, 운동도 할 수 없는 날이다.
어떤 선생님은 무자비한 폭력 상황에 노출됐고, 어떤 선생님은 가슴 아픈 선택을 했다.
현장에 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듣게 되는 그런 것들이 있다.
동기 중 누군가는 우울증에 걸려 병가를 냈다더라, 후배 중 한 명은 교사를 그만두었다더라, 선배의 지인은 법원을 들락거린다더라 하는 이야기들.
직업인의 삶이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히 힘들고 고단한 것이라지만, 교사를 꿈꾸며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각오하지는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임용고시 2차 면접을 준비하며 우리는 학교폭력의 정의와 처리 절차에 대해 배운다.
선생님들을 보호할 수 있는 여러 장치들에 대해 알게 된다.
그래서 각오하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수모와 고난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조직과 법을 믿었다.
하지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교사를 비난하고, 만만하게 생각하며, 무능력하다 생각한다.
그리고 조직은 그 시선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랴, 하며 현장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문제를 교사가 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직무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며 탓을 돌린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들, 학부모, 등 학교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교사를 응원하고 지지한다. 나 또한 천운이 닿았는지 나를 너무나도 좋아해 주는 아이들과 나를 믿고 아이들을 맡겨주시는 학부모 만을 만났다.
그렇지만 내 경우가 그렇다고 하여 벌어지는 수많은 문제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언제 그러한 상황에 처할지 모른다. 그때 조직이 나를 보호해주려고 할까?
아마 학교는, 동료 선생님들은 그렇게 하려 노력하시겠지만 그분들이 도와줄 수 없는 영역에서 우리는 어디에 의지해야 할까.
은행 생활을 오래 하시며 조직에 환멸을 느껴 은퇴하신 아버지가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다.
조직은 원래 그런 것이다.
조직원을 보호해주지 않는 조직은 오래 지속될 수 없지만, 조직원을 적극적으로 보호해 주고 함께 나서주는 조직 또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기관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과 조직원이 충돌하면 당연히 조직은 '조직에게 이득이 되는 편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래, 교육 또한 서비스라는 관점에서 보면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교육을 두고 서비스라고 하는 것은 너무 편협하고 현장에 대해 알지 못하는 행정가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교육은 한 인간을 사회화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아주 독자적인 영역이다.
서비스라는 테두리에 묶는 것은 교육이라는 행위를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파악하기에 벌어지는 오류이다.
굳이 다른 분야와 교육을 엮는다면, 교육은 예술에 가깝다.
아이가 바르게 성장하고 건강하게 사고할 수 있도록 다듬고 또 다듬는, 종합예술인 것이다.
예술을 정량화하고 수치화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육 또한 그렇다.
예술가마다 화풍, 작법 등이 다르듯이 선생님마다 학급 운영 스타일, 위기 대처 방법, 수업 방식 또한 천차만별이다.
어떤 선생님은 학생들이 웃는 모습을 보았으면 해서 놀이를 기반으로 한 학급을 운영하고
어떤 선생님은 학생들의 지적 성장에 초점을 두어 높은 퀄리티의 수업 자료와 일타 강사 못지않은 강의력으로 수업을 진행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자율성을 상실했다.
나의 행동이, 나의 수업 방식이, 내가 준비한 자료가 학생들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 걱정하고,
학생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지도와 교육이 아동 학대로 비치지는 않을까 고민하고,
그래서 나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도와줄 수 있는 것이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 선생님들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흐린 눈, 흐린 귀로 살게 된다.
그러지 말자고, 교대를 졸업하며 했던 참 교사가 되자 했던 다짐은 점차 희석되어 사라진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사회적이라는 의미는 단순히 집단 안에서 교류를 하며 살아야 한다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함께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는 집단 내에 소속되고 싶다는 의지를 반영한다.
그리고 그 의지는 아주 본능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렇기에 교실에서 고립되어 언제 나에게 위험이 닥칠지 모르고 두려움에 떠는 선생님들의 교육은 아주 소극적이고 형식적일 수밖에 없다.
뉴스에서 사건을 보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동시에 이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을 안고 이 흔들리는 감정이 혹여나 아이들에게 전해지지는 않을까,
내 수업에서 아이들에게 잘못된 선입견을 심어주는 발언이 튀어나가지는 않을까,
걱정을 안고 다시 교실에 들어가야 하는 내 처지가 너무도 안쓰러워졌다.
나는 고민이 있으면 평소보다 강도를 올려 훈련을 하고는 한다.
고민은 관심을 먹고 자라는 녀석이라, 고민과 관련된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에조차 숨어서 우리를 괴롭게 한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고민과 사념을 지우기 위해 쥐가 나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운동을 했다.
그럼에도 불편함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날은 '할 수 없구나' 하고 감정의 격류에 몸을 맡긴다.
쏟아내다 보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고.
추모의 마음을 전달하고, 공감과 위로를 보내고 싶지만
나 같은 게 뭐라고 감히 그 고통을 이해한 척 나불댈 수 있을까 싶어서 함부로 입을 열고, 행동할 수도 없다.
그저 조용히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