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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순을 접는 것

농사를 지으면서 깨달은 인생

by 아침햇살

이른 봄, 흙 속에 참외씨를 묻었다.
손톱 밑에 숨어버릴 만큼 작은 씨앗.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마른 그 알맹이가
열흘쯤 지나자 흙을 밀어 올린다.

보글보글, 땅이 숨을 쉰다.
한 점 연두가 고요히 혀를 내민다.
햇살을 닮은 순 하나,
비 한 줄기 지나가면
그 연두는 한 뼘, 두 뼘
내 숨결 따라 자라난다.

참 신기하다.
보잘것없이 묻힌 것들이
제때가 되면 세상을 뚫고 올라온다는 건.

처음엔 마냥 자라는 게 좋았다.
잎이 넓고 줄기가 탐스러우면
그만큼 열매도 많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알게 되었다.
순만 무성하면 열매는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가지가 많은데, 달린 건 별로 없었다.

엄마가 가르쳐주셨다.
처음 몇 순은 과감히 따내야
다음 열매가 힘차게 자란다고.

들깨도 그렇다.
두 뼘쯤 자라면
순을 하나 톡, 접어줘야 한다.
그러면 들깨는 스스로를 복제하듯
가지를 늘려간다.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순을 접어줘야 쓰러지지 않는다.”
지나치게 자라면 바람에 휘고,
몸은 높아도 열매는 없다.

언젠가 남편이 들깨밭에 예초기를 들고 갔다.
순을 치려던 그 손이, 그만 허리를 베었다.
들깨들은 앙상한 몸으로 주저앉았고,
엄마는 전화를 붙잡고 탄식하셨다.

“허리몽댕이를 자르면 어쩐댜.
순만 조심스레 접어주랬지…”

그날 들깨들은 몸통을 잃고 허둥거렸지만,
시간이 흐르자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오 킬로그램의 열매로
우리에게 답했다.

올해 나는 조심스럽게 순을 접는다.
하나의 순이 둘로,
그 둘이 다시 넷으로—
복리처럼 늘어날 것이다.

잡초가 끼어들 틈도 없이
깨밭은 어느새 초록의 구름이 될 것이다.

그 무성한 향기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세상 모든 성장에는
‘덜어냄’이라는 이름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든 가능성을 껴안고 달리는 일은
멋져 보일 수는 있어도
결국은 자신을 가누지 못하는 일이란 걸.

하나의 순을 접을 때마다
나는 또 하나의 나를 키웠다.
무성한 가지가 아니라,
단단한 줄기로.

엄마도 그랬을 것이다.
참외 순을 접으며, 오이 넝쿨을 올려주며,
그토록 많았던 인생의 고비들을
한 올 한 올 접고 또 접으며
열매 하나로 식구들을 배불렸을 것이다.

인생도 그렇다.
버리지 않으면
진짜로 가질 수 없다.

순을 접는 마음,
그건 포기의 마음이 아니다.
한 방향을 택하기 위해
수많은 길을 묵묵히 접어두는 용기다.

그래서 나는 안다.
순을 접는 일은 결국,
나를 피워내는 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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