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이 내 가슴께보다 더 크게 자랐다. 노랑, 분홍, 빨강, 하양… 색색의 옷을 입은 백일홍들 사이로 어디서 나비들이 분주히 모여든다. 누가 알렸을까. 이토록 큰 꽃이 있다는 것을. 광고도, 이끄는 이도 없지만 자연은 정확하게 알고 찾아온다. 거름이 많았는지 유달리 큰 백일홍 꽃잎에 내가 본 것 중 제일 큰 호랑나비가 날아든다. 작은 꽃들에는 작은 나비들이 격에 맞게 모여든다.
몇 년 전 텃밭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가 백일홍 씨앗을 가져왔다. 한 시간 넘게 뙤약볕 아래서 손으로 비벼서 말렸다며 건네준다.
"지금 심으면 얼어 죽어. 내년 봄에 심어. 체로 친 고운 흙과 씨앗을 반반 섞어서 고루 뿌려. 혼자 떨어져 있으면 못 커. 얘들도 모여 있어야 잘 살아."
꽃도 살아가는 방식이 있고 시기가 있어서 저절로 자라지 않는단다. "언제, 어디에, 어떻게’가 중요해." 꽃을 애정하는 친구는 세세히 알려준다.
그녀는 건강보험공단 옥상 8평 남짓한 공간을 꽃밭으로 만들었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씨를 뿌리고 풀을 뽑고 물을 준다. 누가 하라 한 것도 아니고, 실적이 생기는 일도 아니다. 칭찬을 기대하지도 않고, 보고서에 기재될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점심 식사 후 잠깐씩 올라가서 쉴 때마다 빈 공간 시멘트 바닥에 꽃이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힐링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단다. 곧바로 허락을 구하고 자비로 꽃밭을 만들었다. 쉴 시간에 오히려 더욱 힘든 일을 선택했고 노력한 결과 여러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위로와 기쁨을 주는 장소가 되었다. 그곳은 꽃을 좋아하는 그녀의 향기가 가득한 곳, 건강한 곳이 되었다.
한 번은 그녀가 국화를 한 아름 주며 당부한다 “순을 자주 집어줘야 해. 순 지르기를 하는 거야. 한 가지를 자르고 또 자르면 가지가 두 배로 불어나서 화분 가득 꽃을 피울 수 있어. 근데 아무 때나 자르면 다 죽어. 때가 있어. 봄부터 장마철까지 해야 해. 백일홍도 꽃대 물기 전에 지르기를 해. ”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꽃 기르기에 인생이 담겨 있음을 알았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엔 ‘때’를 아는 감각이 사라진 듯하다. 꽃이 피기도 전에 왜 향기가 없냐고 재촉하고,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성과를 요구한다. 잠시 쉬는 사람에게 “왜 멈춰 있냐”라고 질책하고, 다르게 자라는 이에게 “왜 틀렸냐”라고 힐난한다.
조직은 보고서로 꽃을 키우고, 학교는 시험지로 인격을 판단하며, 사람은 시스템 속 ‘프로젝트’로 이름이 붙는다. 개인의 계절은 삭제되고, 모두에게 똑같은 시기에 똑같은 방식으로 피기를 강요한다.
요즘 들어 친구의 말이 자꾸 생각난다. “혼자 내리 피면 재미없잖아. 그래서 백일홍은 혼자 피지 않아. 어울려 피지. 그런데 자세히 관찰하면 백일홍 한 송이가 오래가는 것이 아니야. 하나가 피면 또 다른 하나가 지고, 그 피고 짐이 반복되며 꽃밭은 석 달 내내 피어오르는 거야." 한꺼번에 모두 피었다 쉽게 지지 않고 서로 물러나며 자리를 내어주면서 피고 지기에 오래도록 아름다움을 발산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계절을 가진다.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시간에 피고 또 질 줄도 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피어날 때를 기다릴 줄 알고, 피었으면 질 줄도 알아야 한다. 지금이 ‘순 지르기를 할 때’인지 ‘기다릴 때’인지 '피어날 때인지', '져야 할 때인지' 아는 감각,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매우 필요한 자양분이 아닐까. 내가 피어날 때 누군가 물러서 준 것처럼, 친구의 꽃이 피어날 자리를 마련해 주는 지혜를 얻는다. 여름 들머리에 핀 백일홍이 유난히 사랑스럽다.
“친구야, 나는 지고. 네가 피어날 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