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머무는 소리

네 삶의 BGM

by 아침햇살

사랑하는 딸에게,

오늘은 개교기념일이라서 출근을 하지 않은 네가 늦잠을 자나 싶더니

피아노 선율을 선사하며 아침을 여는구나.

오늘따라 네 피아노 운율이 사랑스러워.

건반 위에 흐르는 네 마음의 평화가 내게까지 스며드네.

고맙다, 딸아.

이 평안이 흘러 흘러 아빠와 네 동생에게까지 스며들기를 빌어. 눈을 감고 운율에 몸을 맡겨보니 오래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어.


소리를 담아낼 줄 아는 딸아,

네가 목이 퉁퉁 부었을 때였지. 속히 낫기를 기도하며 흰 죽을 끓이고 있었어. 어렸을 적 나의 엄마가 했던 것처럼 다섯 시간 동안 불려둔 흰쌀을 참기름 두른 주물솥에서 살짝 볶은 뒤, 받아놓은 쌀뜨물을 붓고 약한 불에서 저어가며 뭉근히 끓였어. 조용하던 수면이 봉봉거리다가 점점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지.

그때 네가 침대에 누워 빙긋 웃으며 말했어.
“엄마, 죽 끓는 소리가 참 예뻐. 그 소리를 듣기만 해도 뱃속이 평안해지네.”
그 순간 엄마도 솥 속의 보글거림이 단순한 소리를 넘어 음악으로 들렸어. 내 가슴마저 따뜻하게 데워주었지.

물이 끓으며 내뿜는 작은 숨결 같은 소리, 그 잔잔한 리듬이 나를 차분히 감싸주었어.


그날 이후 나는 죽 끓는 소리는 물론 모든 소리에 민감해졌단다. 소리 채집가가 되기로 했어. 네가 내게 일깨워준 것처럼, 소리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마음을 붙들어주는 삶의 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야.


지난봄에 비가 많이 오는데 왜 밭에 가냐고 물은 적이 있었지? 나는 그 빗소리가 좋아서 갈 때가 많았어.

에어컨 실외기 위에 떨어지는 불안한 빗소리나, 자동차 바퀴에 휘몰아쳐 내팽개쳐지는 소리, 건물들을 타고 내려오는 축축한 빗소리 하고는 다르거든.

범부채 꽃잎에 매달린 빗방울 속을 본 적 있니? 작은 물방울 속에는 의외로 신비로운 숨소리들이 투영되곤 해. 그 순간들은 비 온 뒤에야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야.

또 감나무 잎을 쪼르르 타고 내려오는 감미로움, 단풍나무 꽃잎 끝에 달려서 그네를 타는 단아함,

처마 끝에서 처처록처처록 떨어지는 소리, 큰 항아리에 도도옥도도옥 빗물이 모아지는 소리 등은 그야말로 예술이지.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어야 해.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거든.


농장에서 풀을 매다가도 나는 귀를 기울이곤 해. 쇠비름, 바라구, 명아주, 달개비 같은 풀들과 실랑이를 하며 그것들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으면서 애를 태울 때 뻐꾹뻐꾹 울어대는 그 소리가 왜 그렇게 처량한지. 내가 지금 무얼 하나 싶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

그러나 곧이어 “홀딱 벗고, 홀딱 벗고” 검은 등뻐꾸기 소리가 들려. 스님들의 마음이 그려지고 어느 시인의 말도 떠올라서 빙그레 웃음이 나. 이 새소리는 듣는 사람마다 다르게 들린대. 너는 어떤 소리로 들릴까? 궁금해지네.

그러나 아무리 들어도 소리로 표현할 수 없는 새들의 노래는 나로 하여금 일손을 멈추게 해. 녹음을 해서 들어보아도 끝내 그 소리를 문자로 다 옮기지 못할 때가 있어.


딸아, 살다 보면 이런 일들이 많아. 분명 사랑인 줄 알았는데, 이해하려고 하지만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는 순간들이 불청객처럼 섞여드는 법이야. 마치 소리로는 알겠으되, 끝내 글이나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울림처럼 말이야.


오늘 아침 네가 피아노 건반 위에 올린 선율은 내게 하나의 선물이었단다. 그 소리는 단순히 음악이 아니었어. 마치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햇살처럼 집 안 구석구석을 물들이며, 우리의 하루를 평화롭게 열어 주었지. 나는 그 순간 깨달았어. 삶은 언제나 우리 곁에 배경음악을 틀어놓고 있다는 것을.


오늘은 엄마가 소리에서 배운 인생의 지혜를 너에게 전하고 싶구나.

첫째, 세상에 흐르는 너만의 BGM을 찾아.
삶은 생각보다 많은 소리를 품고 있단다. 죽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 빗방울이 항아리에 모이는 도도옥 소리, 아침을 여는 새들의 지저귐,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의 속삭임까지. 누군가는 그저 소음이라 흘려보내겠지만,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은 그 속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리듬을 발견하지. 네 삶이 지칠 때, 너만의 플레이리스트처럼 마음을 다독여줄 소리를 모아보렴. 그 소리에 기대어 숨을 고르면 다시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둘째, 번역되지 않는 순간도 시간이 흐르면 사랑이었음을 알 수 있어.
엄마도 살아오며 알게 되었단다. 어떤 감정은 끝내 말로 옮겨지지 않고, 어떤 소리는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어. 하지만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삶을 더 풍요롭게 해 주지. 세상은 언제나 해석 가능한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설명할 수 없는 순간과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야말로 삶의 여백이 되어 우리를 단단하게 세운단다. 그러니 굳이 다 이해하려 애쓰지 말고, ‘아, 그렇구나’ 하고 느끼며 품을 줄 아는 사람이 되렴.

셋째, 관계는 미묘한 칵테일이야.
사람 사이에는 늘 달콤함과 쓴맛, 부드러움과 까칠함이 섞여 있지. 완벽하게 순수한 사랑만 있는 관계는 세상 어디에도 없단다. 억지로 미움과 상처를 덮어두지 말고 햇살에 내놓아 일광욕을 시켜 보렴. 시간이 흐르면 그 모순과 불편이 삶의 조미료가 되어, 너만의 독특한 레시피가 완성될 거야. 죽에 소금 한 꼬집이 스며들어야 깊은 맛이 나듯, 관계도 다양한 맛이 함께해야 진짜 어른의 맛이 난단다.

선물을 주는 딸아,
네가 들려주는 피아노 선율이 엄마의 하루를 평안하게 열어주듯, 네 삶도 언제나 너다운 선율로 울려 퍼지리라 믿는다.

사랑을 담아,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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