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이 내 가슴께보다 더 크게 자라났다. 다홍, 노랑, 분홍, 하양, 저마다의 옷을 입은 꽃들이 햇살을 가득 머금고 피었다.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서로의 빛깔을 비추며 환하게 웃는다. 그 위로 커다란 나비들이 날아든다. 이 계절에 이런 나비가 있었던가? 커다란 날갯짓이 마치 꽃밭의 음악처럼 퍼져 나간다. 나는 그 광경 앞에서 잠시 멈춘다. 꽃밭처럼 넓은 마음을 지닌다면, 내 안에도 더 큰 생각들이 뿌리내릴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 씨앗을 내게 건네준 친구의 마음이 이미 꽃밭만큼이나 넉넉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숙아, 백일홍이 왜 백일홍인지 아냐? 저 작은 꽃이 백일 동안 핀단다. 한 송이가 오래 버티는 게 아니고, 하나가 피고 지면 또 다른 꽃이 올라와 피고, 다시 다른 꽃이 이어져 석 달 내내 화단을 밝히는 거여.”
그녀는 웃으며 덧붙였다.
“혼자만 내리 피면 재미없잖여.”
그녀는 늘 그렇듯 구체적이다. 씨앗을 비벼서 분리한 후 햇볕에 정성껏 말려서 뿌릴 준비를 해왔다. 그녀는 기쁨이 넘쳐 씨앗을 내 손에 담뿍 올려놓는다. 씨앗이 아니라 마음을 건네는 것 같아, 순간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녀는 꽃 앞에서 언제나 한결같다. 건강보험공단 옥상, 고작 여덟 평 남짓한 공간을 작은 낙원으로 바꾸어 놓았다. 잠깐의 휴식 시간에도 잡초를 뽑으며,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 시간을 쪼개 꽃을 돌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남는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기꺼이 꽃을 심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스스로를 단련한다. 그녀의 손길은 씨앗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녀의 눈빛은 꽃에 존재 이유를 부여한다.
그녀의 꽃밭은 사계절이 다채롭다. 봄에는 샤스타데이지와 사포나리아가 흰 파도처럼 일렁이고, 여름이면 천일홍과 양귀비, 우단동자가 햇살 아래 춤을 춘다. 가을에는 국화와 코스모스가 저녁노을을 닮아 들판을 물들이고, 겨울에도 남은 줄기 위로 바람이 지나가면 꽃의 기억이 여전히 향기를 풍긴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옥상일지 모르나, 그녀에게는 꽃들이 모여 사는 작은 우주이자, 삶의 깊이를 더하는 성소다.
우리 농장 또한 그녀 덕에 꽃으로 환해졌다. 건네받은 씨앗과 모종 덕분에 허허벌판 같던 땅이 환해졌고, 그 위로 내 마음도 채워졌다. 지친 날이면 나는 꽃밭으로 달려가 위로를 얻었다. 꽃밭에 앉아 있으면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고, 미웠던 이도 이해하게 되었다. 꽃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내는 신비로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어머니 역시 이 꽃밭에 오시기를 즐겨하셨다. 꽃길을 걸으며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눈이 그냥 환해지네. 마음이 온통 꽃밭여.”
꽃밭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은 아이처럼 맑았다. 꽃은 그 자체로 빛이었고, 그 빛은 사람의 마음까지 비추었다.
씨앗 하나가 꽃이 되고, 꽃밭이 되어, 마침내 마음을 밝히는 등불이 된 것은 그녀 덕분이다. 그녀의 웃음은 언제나 꽃처럼 피어나고, 그 웃음을 바라보는 나 또한 꽃이 된다. 꽃순이인 그녀가 꽃처럼 환하게 웃는 날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백일홍이 피고 지고 또 피어나듯 그렇게 이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