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아버지의 구순잔치

―엄마에게 찍어 올린 풍경 하나―

by 아침햇살



2025년 10월 18일, 작은아버지의 구순을 축하했다.

올해 4월 초, 엄마가 돌아가셨고 다음 달 5월에 작은아버지의 아흔 번째 생신이 있었다.

작은아버지는 “부모 같은 형수님이 돌아가셨는데 무슨 구순 잔치냐.”라며 극구 사양했다.

남은 이들에게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상실의 자리에 햇살이 내려앉아 상처를 다독이고 우리는 엄마의 빈자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언니들에게서 올해가 가기 전에 작은아버지의 구순을 축하하자는 말이 싹트고 있었다. 마침 하와이에 있는 미숙 언니가 서둘렀다.

조카들의 뜻을 받은 작은엄마와 그 자녀들이

“시간 되는 사람만이라도 모이자”라며 초대했다.

장소는 중화산동의〈연가〉.

상차림은 이미 준비되었고, 꽃과 케이크, 하얀 천으로 장식된 무대는 사진 찍기에도 좋았다.

플래카드를 걸고 케이크와 꽃을 더하니 더욱 화사하고 근사했다.

시간 약속에 철저한 곁님이 문을 열었고,

전주에 사는 혜숙 언니는 꽃을 들고 도착했다.

작은아버지와 작은엄마는 서울에서 내려온 희승 내외가 모셨다.

멀리 하와이에서 귀국한 미숙 언니,

광명에서 내려온 영신 오빠 내외도 도착했다.

익산의 영자 언니와 영숙 언니는 순신 언니가 모시고 왔고,

진안 중길리에서 숲속 작은 도서관을 준비 중인 영균 오빠,

좌포의 정숙 언니와 형부는 조카 정섭이가 모셨다.

상견례를 마치고 부리나케 달려온 정국이도 자리를 빛냈다.

다리를 다친 승원이는 목발을 짚고 엄마와 함께 참석했고,

근무 중이던 인호도 짬을 내어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잠시 뒤, 작은엄마의 동생 이종환 목사님 부부와 캐나다에서 귀국한 그들의 큰아들이 아기를 안고 들어왔다. 아기는 방 안의 꽃이라더니 모두의 시선이 아기에게 쏠렸다. 울지도 않고 파티를 즐기는 아기여서 더 사랑스러웠다.

행사 진행은 영신 오빠가 맡았다. 오빠는 타고난 흥부자다.

함께 있으면 눅눅하던 공기가 금세 밝아지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금방 화색이 돈다. 한두 마디로도 웃음의 파도가 일렁이게 만든다.

젊은 시절, 서울에서 웅변을 가르쳤고, 각종 행사의 사회를 맡았던 경험 덕분인지 진행은 매끄럽고 유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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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유봉관 시인이 축시를 읊었고, 혜숙 언니도 편지글을 낭독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노래를 부르며 케이크를 잘랐다.

작은아버지가 훅~ 한 번에 촛불을 끄고, 우리는 환호와 박수로 축하했다.

급히 모인 자리였지만 생각보다 격식이 갖춰졌다.

특히 내가 가장 감동한 것은 노래 시간이었다.

사회자인 영신 오빠는 목사님이다. 그래서 찬송가를 부를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로 시작된 〈학교종〉,

아침 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의 〈바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의 〈우산〉,

깊고 깊은 산골짝에 오막살이 집 한 채~의 〈클레멘타인〉.

노래를 한 곡씩 더할 때마다 어릴 적 모습들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학교 종소리가 들리면 부리나케 뛰어갔던 개구쟁이가 떠오르고,

봉황산에 올라 아아아 소리 지르던 작은 꼬마가,

앞 냇가에서 언니들과 미역감고 다슬기를 잡던 소녀가 ,

메뚜기를 잡아 소주병에 넣고, 고추잠자리를 쫓아 천방지방 뛰어다니던 볼 빨간 아이 시절로 돌아갔다.

특히 시월 요맘때면 봉황산에서 도토리를 줍는 일에 정성을 쏟았던 엄마도 떠올랐다.

할머니 생신날, 동네잔치를 할 때마다 낭창낭창한 엄마의 도토리묵에 찬사를 보내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여든여섯의 작은엄마가 대표로 노래했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어쩜 저리도 젊고 청순한 음색일까. 그 목소리에 모두 감탄했다.

이어서 정숙 언니, 혜숙 언니, 미숙 언니, 순신 언니, 희승이가

각 가정의 대표로 노래를 불렀다.

가장 코끝이 찡한 순간은 엄마의 애창곡 〈고향의 봄〉을 부를 때였다.

“큰외숙모가 제일 좋아하던 노래입니다. 큰외숙모를 기리며 불러봅시다.”

영신 오빠의 한마디에, 덮어두었던 슬픔이 흐르기 시작했다.

영신 오빠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광명에서 출발해서 익산에 들러 언니들을 모시고 고향을 찾는다. 위문공연을 하기 위해서다.

홀로 된 지 오래인 외숙모들은 그들의 방문이 보약보다 큰 위로가 된다.

고모네의 기둥이신 영자 언니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그들의 공연은 옛 서커스단보다 흥겹고 유쾌하다.

그 흥은 적막과 외로움을 퉁소처럼 불며 살던 이들에게

한 달 분량의 웃음을 선물하곤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고향의 봄〉을 자주 불렀다.

노래 끝에는 늘 그리움에 눈물이 흐르곤 했다.

엄마가 닿고 싶었던 고향, 그리고 그 땅의 봄을

엄마는 평생 마음속에 품고 사셨나 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엄마가 이생에서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 그날도 병상에서 몇 소절 부르다가 끝을 맺지 못했다.

지금도 그 노랫가락은 하늘에 닿지 못하고 내 가슴에서 요동친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금지곡이 될 것 같다.

이어서 부른 〈오빠 생각〉도 마음에 동굴을 뚫는 노래였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고모의 아들, 주홍 오빠, 그리고 나의 큰오빠인 정화 오빠를 떠올렸다.

“십오 년, 사십 년이 지나도 아직 눈물이 나서 이 노래는 부를 수 없어.”

순신 언니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육친과의 이별은 영원히 계속되는 법이다.

마지막으로 〈졸업식〉을 함께 부르고 작은아버지께 꽃다발을 드렸다.

항상 웃는 얼굴의 작은아버지는 그날따라 더 밝고 온화했다.

노래 사이사이에 사위들이 무대로 올라와 축하의 말을 전했다.

쑥스러워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한다.


우리는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작은아버지 구순 축하드려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구호를 외치며 함께 사진을 찍었다.

행사가 끝난 뒤, 광명으로 올라갈 차가 고장이 났지만 정섭이의 기술로 무사히 해결했다.

그리고 찻집에 들러 네이버 밴드, 〈하도 좋아〉를 만들었다.

사진을 올리고 가족들을 초대했다.

작은아버지의 구순 잔치는 흩어져 있던 피붙이들을 오랜만에

다시 모이게 한 따뜻한 명분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자리였기에 모두가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은 남았지만, 이렇게라도 다시 뭉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뜻깊은 하루였다.

명사회자의 재치 있는 진행 덕분에 우리는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해맑게 웃을 수 있었다.

그날의 노래와 웃음소리가 아직도 가슴을 데운다.

이따금 〈하도 좋아〉밴드에 사진을 올릴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속삭인다.

“엄마, 그곳에도 단풍이 물들고 있나요?

(2025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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