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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햇살 Jan 30. 2023

아버지의 낡은 사진첩

13년 전 어느 봄날의 일기

아버지의 낡은 사진첩


 아침 이슬에 금방 헹구어 낸 햇살이 되어 그리운 이에게 가고 싶은 봄날이다. 꽃샘추위를 이겨내고 맑은 웃음으로 다가오는 햇발이 반가워서 창문을 열어젖혔다. 안방, 아이들 방 공부방, 화장실, 주방, 다용도실 등 모든 문들도 열고 새봄의 향기로 채웠다. 그래도 돋을양지에 노니는 볕이 아까워서 수납장에 갇혀 있던 것들까지도 꺼내었다. 너덜너덜해진 중학 시절 일기장, 신랑이 군인이었을 때 주고받은 편지, 육아 일기, 아이들 어릴 적에 입던  옷가지들과 사진첩들을 꺼내어  일광욕을 시켜 보리라 펼쳐 놓았다. 이리저리 바지런을 떨던 나는 낡은 사진첩에서 멈추었다.


  해는 아직 젊고 어리다고 누가 표현했던가. 지금 이 순간의 햇살은 눈부시지 않지만 아버님의 유품 중 하나인 그것을 대하니 눈을 뜰 수가 없다. 삼 년이나 지났건만 아직도 아버지를 떠올리면 눈물부터 앞선다.  주름살 하나 보이지 않는 청년 시절의 모습, 자신감과 활력이 넘쳐나는 아버지의  젊음이 사진첩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특히, 눈길이 오래갔던 것은 가난했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발을 쓰시고 저고리와 치마를 입으신 사진 속의 여유로움이다. 이 사진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생전의 아버지는 늘 근엄하신 모습이셨는데 어떤 사연으로 여장 사진을 찍으셨을까 궁금증이 더해간다.


 나의 추억 여행을 시샘하는 듯 구름장이 햇살을 가리고 있다. 잠시 눈을 들어 들판을 보았다. 구름 낀 볕뉘 아래 보리 순들이 더욱 짙푸르게 다가오고, 논두렁을 타고 삼삼오오 나물을 캐는 아낙들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정겹다. 잠시 최명희 선생님이 즐겨 드셨다는 보이차를 마시며 그의 표현대로 토담에서 느낄 수 있는 흙내, 묵은 짚더미 삭는 , 그 향기를 즐기며  다시 사진첩에 빠져 들었다.


  ‘4293년. 9월. 17일’이라 쓰인 할머님 회갑 잔치 사진이 나온다. 윤기 나게 빗어 넘겨 낭자한  할머니의 정갈한 모습을 보니 할머님이 그리워진다. 초등학교 시절,  밭두렁에서 연초록 것들을 소쿠리에 수북이 캐오면, 할머님은 볼웃음을 지으시며 "하도 좋다! 하도 좋아!" 하시며 기뻐하셨다. 그것들을 대청마루에 펼쳐 놓고 냉이, 풍년초, 누룽지나물, 달래, 쑥, 질경이, 꽃다지, 돌나물 등 이름을 가르쳐 주셨다. 국거리와 삶아 무치는 것들로 구분하여 주시곤 했다. 상큼한 냉이 향이 코끝에 와 머문다.


  한 장을 넘기니 젊은 여인의 아리잠직한 자태가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팔순을 넘기신 내 어머니다. 젊은 날의 어머니의 미소가 가슴을 저리게 하는 것은 어인 일일까?  우리 팔 남매는 물론이고 작은 집, 고모네 살림까지 도우시느라 잠시도 쉴 수 없었던 어머니를 동네 사람들은 철인이라 불렀었다. 그런데 신혼의 모습은 참으로 여리고 곱다. 수줍어하는 입가에 살포시 물려있는 웃음. 오는 주말엔 친정 나들이를 해야겠다. 가서 젊은 날의 흔적을 찾아 사진도 찍고 옛이야기도 듣고 싶다.


  엄마처럼 든든한 언덕이 되어 준 큰언니의 사진도 있다. 어른들이 놀리느라고 불룩 나온 배를 보며, “이 배는 무슨 배?” 하고 물으시면 “ 보리밥 배”라고 답했다는 큰언니. 내가 초등학교 일 학년 때, 시집간 큰언니를 만나러 기차 타고 서울에 간 적이 있었다. 용산역으로 마중 나오신 형부는  뜨끈한 국밥을 사주셨다. 처음 먹어 본 국밥이 어찌나 맛있던지 매운 것도 참고 코 훌쩍이며 먹었었다. 남산타워에 갔을 때 가로등 밑에 샛노란 민들레가 있었다.  “서울에도 민들레가 있네” 하는 내 말에 모두 웃던 그 너털웃음이 지금도 들려오는 듯하다. 그날이 더욱 잊히지 않는 것은 형부가  주신 동전 두 개를  잃어버릴까 봐  양말 속에 넣고 불편하게 걸었던 기억 때문이리라.......


 사진첩을 닫으려는데 사진 한 장이 "툭"  떨어진다. 사십여 년 전, 마당에서 벼 타작하는 사진이다. "우두두두둑 우두두두둑 조록조록 조록조록"  홀태에 벼 훑는 소리, "왕왕 왕왕 다락다락다락" 호롱기 돌아가는 소리.......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는 듯한 사진 속에는 늘 상처투성이였던 작은 오빠가 있고, 오줌을 가리기 시작했던 동생도 있다. 깨어진 그릇 조각으로   공기놀이 하는 나도 보인다. 중년의 나에게 아버지의 낡은 사진첩은 많은 이야기를 전해 준다.


 지금쯤 아버지의 산소엔 햇볕이 질펀하게 노닐고 있을 것이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들려주는 곡조에 귀를 세우고 내 아버지도 봄날을 즐기고 계실 것이다. 나도  따사로운 봄볕을 빨아들인 잔디에 누워 아버지께서 즐겨 들으셨던 타령 한 곡조 들으며 사진 한 장 찍어 올리고 싶다. 사진첩을 덮는 손등 위로 햇살이 살포시 내려와 앉는다. 어린아이 피부 같은 햇살 때문인지 그리움 때문인지 두 눈이 스르르 감긴다. 한 줄기 햇살이 되어 아버지에게로 다가가는 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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