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두 입구

존재는 어디서 드러나는가

by 간극

고통은 하나가 아니다.

우리는 늘 같은 이름으로 부르지만, 그 출처는 다르다.


어떤 고통은 분명하다.

원인이 있고, 대상이 있고, 이유가 있다.

우리는 아프다고 말하고, 누가 잘못했는지 따지고,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는지 계산한다.

이 고통 앞에서 자아는 또렷해진다.

경계는 단단해지고, 세계는 적과 아군으로 나뉜다.


이 고통은 우리를 깨뜨리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자아를 더 견고하게 만든다.

우리는 상처를 입었다고 말하지만,

그 상처는 곧 자아의 갑옷이 된다.


이것이 첫 번째 입구다.

의식의 입구.

보이는 고통, 설명 가능한 고통, 정당화 가능한 고통.

이 입구를 통과한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나’로 남아 있다.

더 강해졌을지언정, 더 깊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른 고통이 있다.

이 고통 앞에서는 말이 사라진다.

이유를 묻는 것이 무의미해지고, 원인을 찾는 언어가 허공에 흩어진다.


아무도 때리지 않았는데, 아무 일도 없었는데, 눈물이 흐른다.

새벽의 고요가 갑자기 숨을 조이는 순간처럼,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먼저 내려앉는다.


누군가를 잃은 순간처럼,

혹은 사랑이 식어버린 빈자리처럼,

이 고통 앞에서 자아는 방패를 들 틈이 없다.

설명할 수 없기에 버틸 수도 없다.


이것이 두 번째 입구다.

무의식의 입구.

보이지 않는 고통, 이름 붙일 수 없는 상실, 존재를 흔드는 균열.


첫 번째 고통은 자아를 강화하지만,

두 번째 고통은 자아를 무력화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순간에 존재가 비친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고통은 우리를 성장시킨다.”


그러나 이는 반만 맞다.

자아의 고통은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 뿐,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존재는 오히려 자아가 무너지는 지점에서,

말이 닿지 않는 지점에서,

계산이 멈춘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역설적으로 고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극을 줄이고, 소음을 줄이고, 욕망을 줄였다.


겉으로 보면 회피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자아를 만드는 공장을 멈추는 방식이었다.


자아가 잠잠해질 때, 존재는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들은 고통을 더 맞으려 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만들어내는 자아의 기제를 약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인간은 이 길을 선택하기 어렵다.

우리는 사랑하고, 잃고, 상처받고, 다시 붙잡는다.


그래서 고통은 우리를 밀어붙인다.

때로는 잔혹하게, 때로는 조용하게.


어떤 고통은 우리를 더 완고하게 만들고,

어떤 고통은 우리를 무너뜨려 존재를 드러낸다.


이때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고통이 우리를 깨뜨렸을 때,

그 깨짐이 자아의 붕괴인가, 존재의 탄생인가.


어떤 이별은 우리를 더 냉소적으로 만들고,

어떤 이별은 우리를 더 투명하게 만든다.


어떤 실패는 우리를 더 계산적으로 만들고,

어떤 실패는 우리를 더 솔직하게 만든다.


결국 문제는 고통의 양이 아니라,

고통이 어떤 입구를 통과하느냐다.


우리는 늘 고통을 피하려 하지만,

어쩌면 진짜 두려운 것은

고통이 아니라,

고통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느냐일지도 모른다.


자아의 성벽을 더 높일 것인가,

그 성벽이 무너진 틈으로 존재를 들일 것인가.


그래서 나는 묻는다.


너의 고통은

너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는가,

아니면

너를 넘어선 무엇을 드러냈는가.


그리고 더 잔인한 질문을 던진다.


만약 고통이 없었다면,

너는 과연 존재를 만났을까.


그리고 그 답이 두렵다면,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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