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존재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나를 살게 하기 위한 최소 조건일까,
아니면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을 견디기 위한 형식일까.
나는 나로 존재하지 않으면 숨이 막힌다.
그런데 나로 존재할수록
세상은 나를 불편해한다.
처음엔 몰랐다.
살아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숨 쉬고, 생각하고, 질문하면
그걸로 충분한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존재 자체를 요구하지 않는다.
세상은 기능을 요구한다.
쓸모, 역할, 안정,
예측 가능한 태도.
나는 점점 알게 된다.
존재는 환영받지 않는다는 것을..
환영받는 것은
가공된 나,
설명 가능한 나,
불편하지 않은 나.
그래서 나는
나를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깊은 질문을 줄이고,
지나치게 오래 침묵하지 않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만 남겨두고.
그건 타협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었다.
퍼즐은
튀어나온 조각을 허락하지 않는다.
전체 그림을 망치지 않는 선에서만
개별 조각은 존재를 허락받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를 깎는다.
모서리를 갈고,
빛나는 부분을 덮고,
불필요하게 깊은 균열을 메운다.
세상에 맞기 위해서.
그런데 이상하다.
맞아 들어갈수록
나는 희미해진다.
관계는 안정되지만
내 안은 텅 비어간다.
나는 점점 “괜찮은 사람”이 되지만
점점 “나”는 사라진다.
조화란 무엇일까....
서로를 이해하는 상태일까,
아니면 한쪽이 더 많이 사라진 결과일까.
나는 가끔 깨닫는다.
내가 줄어들수록
타인들은 편안해진다는 것을.
내가 덜 묻고,
덜 의심하고,
덜 깊어질수록
세상은 나를 받아들인다.
그 안도는
이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위험하지 않다는 확신에서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존재를 포기하는 대신
소속을 얻은 셈이다.
문제는
깎여나간 부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라진 질문,
접어둔 감정,
무뎌진 감각.
그것들은 조용히 침전된다.
나는 사회적으로 더 완성되어 가지만
존재는 점점 얇아진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앞에서 묻게 된다.
남아 있는 것이 나인가,
아니면 기능적으로 조정된 형상인가.
나는 나로 존재하기 위해 태어났는가,
아니면 세상에 잘 맞기 위해 태어났는가.
그리고 더 잔혹한 질문은 다시 나를 괴롭힌다.
혹시 내가 나라고 믿어온 이 형상 자체가
이미 오래전부터 타인의 기대가 만든 잔해는 아닐까.
나는 나를 깎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나를 잃어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세상에 맞춰지는 순간
존재는 얇아지고,
존재가 얇아질수록
자아는 더 분주해진다.
나는 더 열심히 말하고,
더 열심히 설명하고,
더 열심히 증명한다.
왜냐하면
안에서 텅 빈 소리를
누군가 들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괜찮은 사람이 되지만
점점 사라져간다.
퍼즐 속에 완벽히 들어맞는 날,
나는 완성되는 걸까
아니면 완전히 없어지는 걸까.
오늘도 나는
조금 더 잘 맞는 조각이 되기 위해
나를 깎는다.
그리고 그 가루가
바닥에 쌓인다.
아무도 그것이
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다.
어쩌면 언젠가
완벽히 맞춰진 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전혀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
존재를 거래했고,
그 대가로
나를 잃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