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 이후.
사랑은 처음엔
피의 착각이었다.
몸이 불타는 동안, 존재는 침묵했다.
열기가 사라지자
우리는 서로를 낯선 생물처럼 바라본다.
“이 사람이었나.”
그때 드러난다.
우리가 원한 건 사랑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를 빌린 안도였다는 사실이.
호르몬이 빠진 뒤 남은 건
서로를 견뎌야 하는 시간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사랑은 식는 게 아니라
서서히 폭로된다.
내가 사랑한 건 네가 아니라,
내가 투사한 나였다는 사실이.
우리는 “사랑이 끝났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존재를 마주할 용기가 바닥난 것이다.
어떤 이별은 상처가 아니다.
서로의 실체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한
정직한 파산이다.
결국 사랑은
호르몬이 사라진 뒤에도
서로의 존재를 지킬 수 있는 자에게만 허락된다.
대부분은 거기까지 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