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남이 아니라, 조율의 붕괴

by 간극

아마

고통과 행복의 교차지점에

유일하게 허락된 존재일지도 모른다.


남녀 사이의 술 한 잔은 결혼반지가 되고,

운전대 위의 술 한 잔은 결국 손목에 은팔찌를 채운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맥락을 바꾸는 존재도 드물다.


술은

존재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히는

자아의 조율을 무너뜨리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취하기 전이 나인지,

취한 후가 나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둘 다

완전한 나라고 보긴 어렵다.


맨 정신의 우리는

끊임없이 억제하며 살아간다.


욕구는 올라오지만,

행동은 선택된다.


우리는 그것을

이성이라 부르지만,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환경에 맞춰진 조율이다.


반대로 술은

그 조율을 풀어주는 게 아니라

망가뜨린다.


그래서 드러나는 것은

존재 하나가 아니다.


감정, 충동, 기억, 무의식이

한 번에 섞여

필터 없이 튀어나온다.


술은

진짜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섞어버린다.


술은 이성을 무너트리는데 최적화가 되어있다.

평상시 하지 않을 판단과 언행의 필터를 여지없이 파괴시킨다.


자아라는 필터가 무너지는 순간,

우리는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 속으로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평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숨기고 있던 패턴을

그대로 반복한다.


술은

그동안 쌓여 있던 무의식의 패턴을

날것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그걸

태도라고 부른다.


평소에는

혼자만의 베일에 가려져 있던 관점이

술을 통해

타인에게 강제로 공유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술이 사람을 변하게 했다”라고.


하지만 더 정확히는 이렇다.


변한 게 아니라,

조율이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드러난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 사람이 지니고 있던 방향성 중 하나인 것은 맞다.


문제는

우리가 그 상태를

“진짜 나”로 착각한다는 데 있다.


억제된 나도,

붕괴된 나도

둘 다 온전한 상태는 아니다.


그래서 중요한 건

술을 마셨느냐가 아니라,

그 이후에

어떤 상태로 남느냐다.


그 격차가 큰 사람은

술 때문이 아니라

원래 그 격차를 안고 있던 사람이다.


오늘도 우리는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확률에

술자리를 건다.


하지만 그건

해방이 아니라

조율을 내려놓는 선택에 가깝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선택의 결과를

다음 날이 되어서야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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