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과 소멸의 간극
부재.
사전적 정의로는 '그곳에 있지 아니함'이다.
나는 이 아쉬움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국 부재라는 지점에 닿는다고 느낀다.
그건 없어진 게 아니라, 있었는데 지금은 닿지 않는 상태다.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그 자리에만 없을 뿐이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부재는 사실 '실존적 부재'다.
부재중 전화를 떠올려보면 된다.
통화를 시도한 흔적은 그대로 찍혀 있다.
연결이 안 됐을 뿐이지, 그 사람이 사라진 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어느 순간, 존재적 부재 쪽으로 밀어 넣고 싶어진다.
눈앞에 없으면 없는 걸로 처리하는 게 훨씬 편하니까.
뇌도, 나도.
누군가는 묻는다.
나는 기억하고 있고, 내 안에서는 여전히 살아있다고.
맞다.
의식은 붙잡으려고 한다.
부재의 고통까지도 끌어안으면서.
그런데 무의식은 조금 다르게 움직인다.
살기 위해서, 덜 아프기 위해서,
그 존재를 시나브로 옅게 만든다.
완전히 지우는 게 아니라,
없는 것처럼 다루는 쪽으로.
그래서 우리는 기억은 붙잡고 있으면서도,
감정은 조금씩 분리해 낸다.
같은 것을 두고,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셈이다.
특히 나랑 거의 한 몸처럼 연결돼 있던 존재의 부재는
이탈이든, 소멸이든 결국 고통은 똑같이 온다.
다만, 겪는 입장에서는 이탈이든 소멸이든 결국 같은 부재로 느껴진다.
그래서 굳이 나눠본다.
실존적 부재는 있지만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이고,
존재적 부재는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지금 옆에 없는 건 정말 크게 아프다.
하지만 그걸 애초에 없던 걸로까지 밀어 넣지는 않았으면 한다.
영혼이 있는지, 윤회를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내 뇌 어딘가에 남아 있는 한,
그 존재를 완전히 없었다고 말하는 건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고통이랑 망각은 자꾸 이걸 존재적 부재 쪽으로 끌고 간다.
아마도 살기 위해서겠지… 덜 아프려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이왕이면, 조금 덜 아프게.
힘내.
기운내.
살아야지.
다 좋은 말이다.
다만 나는 거기에 한 줄만 더 붙이고 싶다.
그건 완전히 없어진 게 아니다.
이 말 하나만 있어도
조금은 덜 무너지고,
조금은 덜 쓰라리게 아플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