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함이라는 이름의 면허에 대하여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네가 잘됐으면 해서 하는 말이야.”
“다 너를 위한 거야.”
살아오며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말들이다.
이 말들은 대개
솔직하고 객관적이라는 얼굴로 등장한다.
마치 그 솔직함에
상대의 경계를 넘을 수 있는 권한이
자연스럽게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이 말이 던져지는 순간,
이미 하나의 대전제가 깔린다.
내 말은 옳고,
네가 불편해진다면 그건 네 문제라는 전제.
우리는 이 조언 같지 않은 비수를
의사와 상관없이 끌어안아야 했다.
아파도 내 몫이고,
피하려 하면 비겁자가 된다.
특히 관계 안에서,
혹은 힘의 균형이 기운 자리에서
이 솔직함은 더욱 노골적으로 작동한다.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아는 듯
유유히 웃으며 말을 던진다.
예전에는 몰랐다.
“아, 내가 부족했을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받아들이며
이 비수를 성장의 거름이라 믿었다.
하지만 겪고, 또 겪고 나서야 알게 된다.
솔직함이라는 말 아래
일방통행으로 내 존재를 재단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물론 내가 부족했을 수도 있다.
그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 부족함을
타인이 마음대로 규정할 권리까지 갖는 건 아니다.
사악한 건
그 부족한 틈을 집요하게 물어뜯는 방식이다.
실수는 약점이 되고,
약점은 공격의 신호가 되는 세상에서
솔직함은 너무 자주 무기가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 약점은
내가 어떤 사람과 관계를 이어가야 할지를
가장 정확히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약점을 드러냈을 때
함께 서려는 사람이 아니라
그 틈을 파고드는 사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솔직함을 가장해 폭력을 가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그 말을 들어주는 순간,
그 폭력에 강제적으로 공감해 주는 셈이 된다.
그렇다고
모든 실수와 부족함을 정당화하라는 말도 아니다.
그들은 그 정당화마저
다시 물어뜯을 것이다.
차라리
스스로의 손으로 비수를 꽂아라.
어디가 약한지,
어디를 보완해야 하는지
내가 먼저 직면하는 편이 낫다.
다음번에 그 자리는
분명 더 단단해져 있을 것이다.
정말 용기가 없는 건
남의 솔직함에 기대어
끝내 나를 마주하지 않는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