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 위를 걷는 기준

희생은 왜 우리 안에 닻처럼 남는가

by 간극

영화 〈볼케이노〉는 1997년에 개봉했다.

영화의 대부분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 있는 장면은 단 하나다.


용암이 들끓는 위에서

한 기관사가 아이를 안고

아무 말 없이 그 위를 걷는 장면.


내가 아는 ‘뜨거움’이란

삼겹살에 튄 기름 몇 방울,

커피를 끓이다 손에 튄 뜨거운 물 정도였다.

그 정도의 통증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움츠러들고, 겁을 먹는다.


그런데 영화 속 그 장면은

내가 감히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숭고한 희생은 늘

객관적인 판단과는 반대로 움직이고,

이성적인 계산과는 다른 노선을 택한다.

그 장면이 그랬다.


그 이후로

그 기관사의 선택은

내 삶 어딘가에 고정된 닻처럼 남았다.


내가 나를 기준으로 행동하려 할 때마다,

‘이 정도면 됐지’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때마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게 될 때마다

그 장면은 말없이 나를 붙잡았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배려가 아닌 것처럼,

희생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기준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혹시 저 장면이 영화가 노린 지점은 아니었을까.

자본주의적인 장치로

희생의 기준을 과도하게 끌어올린 건 아닐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은 내 안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래…

지금 이 상황이

용암 위를 걷는 것보다는 낫지.”


그 생각은 너무 깊이 박혀버렸다.

이걸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지금도 헷갈린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다.

영화는 영화다.


지금의 세상에서

용암 위를 걷는 사람은

쉽게 미담이 되지 않는다.

의도가 무엇이든

어리석은 사람,

호구라는 잣대가 먼저 들이대진다.


그가 구한 아이가

내 가족일 수도,

당신의 가족일 수도 있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나는

용암 위를 걷는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구해야 하는 순간,

그 사람이 ‘내 사람’인지 판단해야 하고,

그 고통의 크기를

끝까지 감당할 용기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장면에 감동받은 지점과,

그렇게 살 수 있을지에 대한 현실 사이의 괴리는

지금도 내 존재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아마 이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숙제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희생하며 살 수는 없다.

모든 순간에

타인을 먼저 둘 수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장면이

내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완전히 차가워지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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